거기는 ‘그런 곳’이라고 암암리에 인정해왔다. ‘그런 곳’은 심지어 만병통치약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 곳’을 경험한 자와 아닌 자는 처우가 달라지고, ‘그런 곳’을 경험하고 무사히 살아나오면 ‘인간이 된다’고도 했다. ‘그런 곳’은 ‘그런 곳’을 묵인하는 다수에 의해 점점 더 ‘그런 곳’이 되어갔다. 서열, 폭력, 은폐. 모두 그러니까 안 그런 게 오히려 이상한 ‘그런 곳’은 그렇게 우리들 속에 있었다, 있다. 혹자는 ‘그런 곳’에 갔다 와야 진짜 남자다, 어른이 된다고도 했다. ‘그런 곳’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은 작은 영웅이 되어 무용담을 만들고, ‘그런 곳’은 ‘그런 곳’답게 집단적으로 세뇌되었다. 목숨을 앗겨도 국가에 바쳤다고 자위하며 살아야 하는 ‘그런 곳’의 불문율을 향해 좀더 일찍 ‘왜?’를 외쳤어야 했다. ‘그런 곳’에서 아들을 잃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외롭게 싸우는 부모들과 더 일찍 손잡아야 했다. 오랫동안 묵인된 ‘그런 곳’에 이제야 문제제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솟는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곳’은 아닌가? 군대는 그런 곳, 정치판은 그런 곳, 요즘 대학은 그런 곳, 병원이란 그런 곳…. 그러나 포기해버리면 ‘그런 곳’을 정말 ‘그런 곳’으로 만든다. 아니라고 말하자. 비극이 터질 때마다 나만은, 내 새끼만은 괜찮기를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문제를 말하자. 그런 것조차 하지 않으면 이곳은 ‘그런 곳’으로 봉인되고 출구를 잃는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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