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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등록 2014-08-15 19:5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제주 유배길을 걷다-제주유배길 종합안내서>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 2013
말을 섞는 것은 몸을 섞는 것보다 심각한 일이다. 나는 대화라는 말, 대화 행위에 긴장한다. 스승과 제자, 상담자와 내담자(정신과 의사와 환자), 수도자와 신자의 관계는 모두 말이 집중적으로 오가는 사이다. 특히 삶의 지혜와 고통 같은 진한 말이 이전되기 때문에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업윤리는 이들 간의 사랑을 금지한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금기하는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의 최고 걸작이라는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59살에 제주 유배 중 남긴 작품이다. 당시 청나라 연경에서 유학하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린 것이라 한다. 이상적은 권세를 따르는 무리들과 달리 귀양살이 중인 스승에게 정성을 다했고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추운 나무 두 그루와 작은 집 옆에 긴 글귀가 있다. 스스로 쓴 발문이다. 중간에 공자를 인용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이다. <제주 유배길을 걷다>의 원문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고 되어 있다.(54쪽) ‘후(後)’를 직역한 듯한데 문장도 다소 어색하고 침엽수인 송백은 “뒤늦게 시듦”이 아니라 아예 시들지 않기 때문에 이 글 제목은 내가 조금 고친 것이다.

문인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탓이겠지만 위 구절에 대한 해석은 대개 억울한 귀양살이, 제자의 의리, 절개, 곤경에서 꽃핀 예술혼 등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분적 해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세가 있을 때는 상록수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권력이 상록수처럼 영원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이 찾아온 후에야” 지조 있는 이가 생각난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발상도 승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속의 탄식이다. 변치 않는 정리를 강조할수록 권력의 효과는 커진다. 속세의 권력이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동력은 아니다. 권력은 무엇인가를 소유했다는 착각일 뿐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이다.

스승과 제자가 모두 여성인 관계 모델은 비가시화된 사실(史實)이 많아 안타깝지만, 어쨌든 <세한도>는 역사상 넘쳐났던 브로맨스(남성과 남성 간의 애정)의 산물이다. 좋은 스승이나 친구는 나를 형성한다. 내가 만일 추사의 제자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알려진 대로 김정희는 쉽게 나올 수 없는 대학자이자 문예에 밝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노력이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천운이다.

나는 곤궁한 처지의 스승에게 잘한 것이 대단한 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의 매력은 지위가 아니라 문장, 지성, 인품 아닌가. 이상적이 정의 차원에서 스승에게 잘한 면도 있겠지만 역관(譯官)이었던 그 역시 주류일 수 없었다. 역관은 중인 계급이었고 ‘설인(舌人)’이라 불렸다.

유배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과 대체할 수 없는 신뢰와 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소통의 즐거움과 국외자만이 갖는 여유가 있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이를 사랑한다. 인생의 절정은 성별, 계급, 나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상호 성장을 위해 자잘한 것(권력, 돈, 명예) 혹은 자기가 알던 유일한 세계를 포기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이 그런 경우다. 좋은 인간관계에는 <세한도> 같은 걸작을 포함 다른 형태의 권세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이 계절, 어감은 시원하지만 <세한도>의 유일한 해석이라면 걸작을 권력의 그늘에 가두는 일이다. 권력은 짧고 관계는 영원하다. 관계는 어떤 물리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책을 보낸 제자의 마음을 헤아린 완당은 이렇게 썼다. “천만리 먼 곳에서 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 구한 것이니 한 번에 가능한 것도 아니고…”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제주 유배길을 걷다>는 비매품으로 전용 홈페이지는 공사 중인지 열람이 불가능하다. blog.naver.com/jejuyubae나 facebook.com/jejuyubae를 참조하면 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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