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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썩지 않는 사랑

등록 2014-08-08 20:00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모성적 사유: 전쟁과 평화의 정치학>
사라 러딕 지음, 이혜정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2

존 부어먼 감독의 <태평양의 지옥>(1968)에는 흥미로운 설정이 등장한다.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군과 일본군이 망망대해 무인도에 표류한다. 적국의 두 남자는 서로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싸운다. 포로와 감시자를 교대하다가 기진맥진한 두 사람은 나중엔 포로가 되려고 애쓴다. 포로는 묶여 있지만 쉰다. 간수는 감시하느라 잠도 못 자고 먹을 것을 구하고 땔감을 마련하는 등 종일 노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이 장면을 매우 좋아한다. 적을 통제한 강자는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먹이고 자연 상태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보살핌 노동자가 된다. 보호-보살핌-감시-통제는 연속적이다. 통제는 지배와 다르다. 보호는 통제를 동반한다. 통제(걱정, 잔소리, 주의 깊은 관찰) 없는 보호는 없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보호에는 훈육이 포함된다. 그렇지 않은 부모가 좋은 부모다? 가능하지 않다.

누구나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보호의 현실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를 둘러싼 가장 비등한 여론은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냐”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국가가 강력한 보호자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세월호의 대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기존의 보호는 보호자(주체)와 피보호자(대상)를 전제한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세금, 충성, 자유의 부분적 포기 등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존 보호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보호자가 보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보호자 남성은 여성을 성(性)과 외모 혹은 아버지가 누구냐를 기준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구분한다. 보호자에게는 차별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가가 보호자일 때 국민이 어느 지역과 계급에 속했는가에 따라 보호 의지가 다르다. 지역 차별이 대표적이다. 현 정권은 이마저도 아니고 “왜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고 반문하고 있다.

보호를 내세운 통치 체제에서는 국가와 인권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보호가 교환과 계약,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권력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 관계적 자아, 공적 규범으로서 보살핌으로 인식된다면 세상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사라 러딕의 <모성적 사유: 전쟁과 평화의 정치학>은 윤리학의 분기점이 된 고전으로 캐럴 길리건의 <다른 목소리>에 이어 돌봄, 보살핌 철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러딕은 보호 대신 보존애(preservative love)를 제시한다.(3장, 126쪽) 보존애는 책임, 보호자의 성찰과 인지, 협상 능력 등을 요구한다.(이 글 제목은 보존애를 내가 직역한 것이다)

<모성적 사유>의 핵심은 노동과 언어의 관계다. 인간의 노동 중 가장 일상적이고 중요하지만 무시된 보살핌 노동의 언어화와 평화의 연관성이 주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제도화된 관행(practice)이다. 모성과 모성적 사유는 다르다. 이 책은 일반의 오해처럼 모성을 찬양하지 않는다. 노동으로서 모성이 개념으로서 모성적 사유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생각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사유를 만든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처럼 ‘틀린’ 말이 ‘좋은’ 말로 회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다 근대의 쌍생아인 생산주의와 ‘상록수 정신’으로 우리를 들볶는 논리다. 삶은 사유의 실현이 아니라 근거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안전은 보호자에게 요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류할 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보호는 상호 보살핌이다. 우리 삶에는 이미 보호의 철학적 기반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5천년간 이어온 가부장제 사회의 ‘어머니’ 노동이다.

필자 주-이 코너의 글 제목은 연재 당시 밝힌 대로 필자의 주장이 아니다. 책 내용 중 의미 있거나 논쟁적인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제목 중 “징병제가 최선”, “장애인 공부해서 뭐하냐”는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선정한 책 내용의 일부다. 간혹 오해하는 독자가 있어 재차 밝혀둔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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