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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우의 빨강] 권태 너머

등록 2014-08-03 18:28

더위에 지쳐 이상의 수필 ‘권태’를 뒤적거렸다.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 쪼이는 볕’에서 헤실 웃었다. 사실, 웃음을 유발하는 문장이 총총 박힌 ‘권태’의 기원은 비애다. 서늘한 배면을 가진 킥킥거리는 비애가 더위에 지친 정신에 잽을 날린다. 지금 특히 ‘권태’가 떠오르는 건 ‘초록’ 때문일 것이다.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이라고 냉소를 보이지만, 이상의 심연에는 초록의 징글징글한 역동성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내야 한 예민한 청춘, 죽기 한 해 전 26살의 이상은 권태를 쓰는 순간에도 실은 권태 너머를 꿈꾸었다.

‘권태’의 마지막은 이렇다.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암흑뿐인 세상에서 이상은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출구 없기로 치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 지리멸렬 너머에 어떻게 당도할 수 있을까, 염서에 오들오들 떨며 묻는다.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 되는 게 첫 관문이겠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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