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은 얼굴의 서른살 청년 민은 프랑스로 돌아가 파트너인 K와 팍스(PACS)에 등록한다고 했다. 모였던 한국 친구들이 민의 ‘언약식’을 축하하며 건배했다. ‘시민연대협약’(pacte civil de solidarit<00E9>) 정도로 번역되는 팍스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살기로 한 개인 간의 계약’이라 할 수 있다. 합의한 계약서를 법원에 신고하면 프랑스 정부는 조세와 사회보장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전통적 의미의 결혼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법적 지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팍스로 가족을 이루는 이성/동성 커플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안정적 직업이 없는 청년인데도 민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삶을 즐기며 살아가겠다는 힘이 있었다. 자신에게 열려 있는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을 때 나오는 여유 말이다.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그늘진 우리 청년 세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도 비혼 인구가 늘고 있지만 아직은 자발적 선택보다 주로 사회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늘어나는 동거 커플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커녕 또 다른 가족 형태로서의 가능성부터 검토해야 하는 수준이다. 다양한 형태의 커플과 가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감각을 섬세하게 진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혼 커플의 아이가 ‘법률적 결혼’ 없이도 축하와 제도적 지원 속에서 태어날 수 있는 때를 상상해본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