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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하냐

등록 2014-07-25 19:4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노들장애인야학 스
무해 이야기>, 홍은전 지음, 까치수염, 2014
세월호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사람마다 그 정도와 감각의 시간은 다르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의 경우 삼풍백화점 사건 때는 지인의 가족이 사망했지만 세월호 희생자 중엔 연관된 이가 없다. 두 사건의 비교를 차치하고, 개인적으로는 세월호가 훨씬 충격적이었다.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후감은 독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독자의 상황(콘텍스트)이 책(텍스트)의 의미를 정한다. 내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노들장애인야학 스무해 이야기>가 그랬다.

나는 10여년 전 노들야학에서 몇 차례 강의한 적이 있고 그때의 감동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비장애인이 장애인, 장애인 운동과 만났을 때 그들을 타자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장애인 비하가 아니라 깨달음, 죄의식, 배움이었지만 어쨌든 내 기준에서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노들야학은 장애 성인의 교육 기관으로 노란 들판이란 뜻이다. “식사하셨습니까”(147쪽), “연애하고 싶은 장애인”(185쪽)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장애인은 알기 어렵다.(책을 읽기 바란다.)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하냐”(23쪽) 책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폭력과 지난한 투쟁도 성실히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 공부의 의미에 공감했다.

대학에 가고 싶은데 “네가 왜 공부를? 안마사를 하면 될 텐데”라며 만류하는 교사, 부모, 친구들 때문에 고민하던 고3 시각장애인 학생이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공부에서 뭐하냐”. 이런 얘기,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사회운동단체에서 상근하다가 서른살에 일반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때만 해도 “따까리(간사)가 왜 공부를?”에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까지 들었다. 내가 다른 성별, 나이, 계층이었어도 그런 말을 들었을까. 사회운동에 회의가 들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나는 공부를 하면서 ‘진짜 운동권’이 되었다.

공부의 필요와 의미는 본인이 정하는 권리다. 사람들은 진학 차원이 아니더라도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이 없다”, “인간은 평생 공부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부나 장애인이 공부하고자 할 때는 태도가 다르다. 이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역할’(안마, 가사노동…)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위하는 일은 사회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은 사회의 것이다. 근대 초기 미국에서 초등학교 의무교육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도 주부와 노예는 예외였다. 인간은 스스로 대단한 문명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차별 의식은 문명의 몇 배를 앞서간다.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등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 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우리는 운동이 없는 배움, 배움이 없는 운동에 대해 ‘운동’의 이름으로 맞선다.”(127쪽)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생각은 현실과 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서른살 이후, 나는 이를 억압하거나 비웃거나 불편해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상대방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우리 사회는 학습과 사회운동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단체 상근자들은 공부할 필요, 조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전문가’ 의견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실무자와 전문가는 별도로 성립할 수 없다. 사회운동, 회사, 관료 조직을 막론하고 전문성 없는 실무자와 현장 능력이 없는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이들의 결과가 ‘세월호’다.

사족-나는 이 글을 세 가지 버전으로 썼다. 애초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저자에게 미리 점검을 요청했는데 많은 지적과 오해가 있었다. 재현(글쓰기)의 근본적 폭력성! 모든 글의 자의성이 세상을 만든다. 두렵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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