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감정공부: 슬픔, 절망, 두려움에서 배우는 치유의 심리학>, 미리암 그린스팬 지음, 이종복 옮김, 출판사 뜰, 2008
<감정공부: 슬픔, 절망, 두려움에서 배우는 치유의 심리학>, 미리암 그린스팬 지음, 이종복 옮김, 출판사 뜰, 2008
“경비는 뭐하나!”. ‘하찮은’ 방문객이 찾아올 때 주인의 일반적인 대사다. 나도 종종 듣는 말인데, 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는 ‘주인-방문객-경비’의 권력관계, 즉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을 대표하는 것 같다. 어쨌든, 주인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복(公僕)이 주인을 쫓아내겠다고 소리쳤다. 7월1일,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에서 새누리당 소속 이완영 의원(경북 고령·성주·칠곡)이 유가족에게 한 말이다. 그는 다른 의원의 질의 시간에 자다가 유가족이 항의하자 경비를 찾았다. 비판이 일자 그는 항변했다. “밤새워 공부하느라 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유가족의 분노는 어땠을까. 분노. 이 말은 특정한 문맥에서만 의미 파악이 가능한, 어려운 단어다. 이유 없는 분노는 없다. 각자 다 정당하다. 동시에 모든 분노에는 가해자의 분노, 필요 이상의 분노, 다른 문제가 전도(顚倒)된 분노가 섞여 있어 분간하기가 어렵다.
해결 방법도 출구도 없는 분노를 겪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세월호’ 그리고 내가 항상 고민하는 나 자신의 어떤 경험은, “아이들이 장난삼아 파리를 죽이듯, 신이 장난삼아 우리를 죽이는”(48쪽) 데서 오는 분노다. 특히, 선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이용당한 경우나 느닷없이 무고한 피해를 당한 이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복수하거나 참거나. 상반되는 대처 방식 같지만 둘 다 피해자만 파괴된다. 상처는 재해석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아프니? 나는 안 아픈데. 마음을 비우면 되거든.” 시장에 넘치는 힐링서들 중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제를 피해자의 마음 탓으로 돌리는 책들이 많다. 어디를 비우라고? 마음은 몸인데 비우면 죽지 않을까? (남에게 비우라고 말하기 전에 ‘멘토’들은 자기 마음, 아니 통장부터 비우기 바란다.)
어떤 사람은 매일 오후 3시 초콜릿 쿠키 한 개를 먹는 습관을 고치려고 ‘고통에 관한’ 책을 썼고 3킬로를 감량했다. 그러나 매일 밤 쇼콜라 초콜릿 케이크 한 판을 시작으로 폭식에 중독된 사람에게 이 책은 열패감을 안겨주었다. 평생 온몸이 종합병원, 말년엔 루게릭병으로 식도와 혀가 마비되어 8개월간 굶다가 “배고픔과 분노가 없는 세상으로 간” 어떤 이에게, 다른 루게릭 환자의 우아한 인생 강의는 “내 인생은 비참했다”는 유언을 남기는 데 일조했다.
당연히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없다. 그럼에도, 삶을 얕잡아 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책들이 많이 팔리는 것은 우리 사회가 ‘부정적’ 감정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암 그린스팬은 <우리 속에 숨어 있는 힘: 여성주의 심리상담>(1995)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감정공부>는 좀 더 ‘개인적’, ‘실용적’, 실존주의적이다. 하지만 전작의 인식론적 전제를 공유해야 감정공부도 수월하다.
책의 요지는 원제대로(Healing through the Dark Emotions), 고통스러운 감정의 수용을 통한 배움과 치유다. 누구에게나 고통, 상실, 죽음, 취약함, 고립, 혼돈은 두려운 감정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견디기 힘든 감정을 서투르게 다루는 방법이 우리를 더욱 괴롭힐 뿐이다.(11쪽)
“도와주세요, 고맙습니다, 감정에 저를 맡깁니다.” 치유는 고통에 대한 세 가지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슬픔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136쪽) 고통 받는 인간은 선택 받았다. 누구도 이런 선민이 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 것을.
다만, 사회가 이들에게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 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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