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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무명용사의 묘지

등록 2014-07-04 19:45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사회비평사, 1991
세월호 피해자는 광범위하다. 숨진 학생, 교사, 승객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자, 안산과 진도 주민들… 특히 민간 잠수사의 사망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금까지 이광욱씨와 이민섭씨, 두 명의 잠수사가 수색 작업 도중 사망했다. 이들이 부패 무능한 관(官)에 의한 ‘국가 피해자’라고 할 때, ‘국가 유공자’와 어떻게 다를까.

미국 수사 드라마를 보면 자살, 자연사, 사고사, 살인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사이클’이라고 하는데 실상 이 네 가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개 장수에 고통 없는 죽음을 호상(好喪)이라고 하지만 하도 사고가 많다 보니 생로병사 차원의 죽음만 맞아도 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 외부 상황에 의한 죽음. 의사(義死), 열사(烈士), 공권력에 의한 죽음, 사회적 타살로서 자살, 전쟁터에서 죽음,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자살 폭탄 테러, 순교…. 이처럼 타인에 의한, 위한 죽음이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의사자, 사회구조의 피해, 역사 창조의 의지로 나눌 수 있을까.

타인을 위한 죽음이라고 해서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한 죽음 여부가 아니다. 그 타인의 구체성이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돕다가, 세월호 현장에서 일하다가, 용의자와 격투를 벌이다 사망한 시민들. 의로운 죽음은 이들처럼 타인을 돕는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의지와 이유가 분명한 죽음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는 유명한 원제와 “근대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묘지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는 구절로 유명하다.(25쪽)

우리 사회에서 위 두 가지 담론처럼 오해와 논란이 많은 ‘서구 지식’도 드물 것이다. 송두율의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2000)를 읽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민족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아마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유일한 불멸의 유산일걸요.”

징집되어 생판 모르는 이들을 죽여야 했던 병사들은 의사자가 아니라 ‘호국영령’ 혹은 ‘×죽음’으로 불린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뜻이다.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 민족이 상상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였던 앤더슨은 민족 개념이 탄생하게 된 물적 기반을 확실히 했다. 근대 인쇄술의 발달은 출판물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고 사람들의 의식을 동질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족이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다. 국가를 만들기 위해 민족이 발명된 것이다. 무명용사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이다. 그래서 의사자는 그 희생으로 살아남은 특정 개인에 의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지만, 무명용사와 전사자는 국립묘지라는 집단 기억의 장소와 날(현충일)이 정해져 있다. 모르는 사람, 즉 국가라는 상징적 정체(政體)를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지구상 어디에도 상상의 공동체는 완성된 적이 없다. 미완은 이 공동체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국가안보를 핑계로 국민의 안전을 짓밟는 것은 불법적 통치 행위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세월호 사건에서 나를 계속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은 이광욱씨가 ‘카카오 스토리’에 남긴 “간만에 애국하러 왔네”다. 그가 사용한 공기 공급 호스는 주변에 설치된 유도줄 등과 얽혀 있었고 결국 사망했다. 사고사, 시설물에 의한 타살이다.

그는 타인을 구하러 온 것이지 애국하러 온 것이 아니다. 두 죽음 사이에 위계는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라 의사자(body)와 호국영령(ghost)이 구별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죽음이기 때문이다.

“간만에 애국”은 구체적 개인을 위한 의로운 죽음과 민족 관념을 위한 행동이 구분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국민 보호라는 국가 기능이 없다 보니 타인을 위한 정의가 곧 국가를 위한 일처럼 여겨진다. “간만에 애국”이 하염없이 슬픈 이유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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