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외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국자’도 많고 국가에 대한 기대도 크다. 이 사건이 깊은 충격을 남긴 이유는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과, 사건 이후 보도를 접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사건의 전 과정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당국의 대응이 없다 보니 생긴 일이다. 우리 눈앞에서 매순간 생명이 사라졌다. 내가, 우리가, 정부가 “제발 뭐라도” 조치를 취했다면. 자책과 분노가 꺼지지 않는다. 단계마다 당국의 “플랜 B”가 전혀 없다는 사실과 이러한 현실에 대한 사회지도층의 인식(교통사고, 시체장사, ‘정몽즙’, 대통령의 우아함 등)은 우리를 절망케 하기에 충분했다. 한반도 역사 내내 민초들의 갈망이었던 ‘제대로 된 국가’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무너졌다. 나라를 뺏긴 설움도 아니고 나라가 사라진 불안.
일상을 평화라고 가정하면 그 반대 개념은 전쟁, 비상사태, 예외 상태 등이다. 정치 개념의 출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디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영토(‘집’)고 어디가 교도소이고 길거리인지, ‘마음의 감옥’인지… 생명이 어디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 슈미트 사이의 엇갈림을 매개하고 그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면서 포스트모던 이후 우리 시대의 정치와 철학의 범주들을 급진적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독창적 사유의 용광로”. <호모 사케르> 표지 문구를 읽고 잠시 웃었다. 정확한 요약이지만 언제적 이야기? 스피박과 버틀러는 어이없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여성)는 원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였거든!”
물론 <호모 사케르>는 의미심장하다. 여성주의자들이 예전부터 외쳐왔으나 외면된 주장을 간단하게 유행시킨 백인 남성 지식인의 권력도 새삼 흥미롭지만, 그럼에도 신학과 철학, 정치학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아감벤의 치열한 지성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 책은 9·11 이후 인류의 삶을 명확히 했다. 이 시대의 지배 방식은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의 역할은 국민을 보호, 탄압,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모호한 곳에 있게 하는 것이다. 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별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세월호는 항상 비상임을 상징하는 지역(地役)이다. “나를 보호해줄 국가는 어디에?”라는 두려움 자체가 통치 권력인 것이다.
국경이라는 전통적인 경계에 대한 전복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관타나모 수용소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쿠바 남동쪽 관타나모 만(灣)에 설치된 미 해군기지 내부에 있지만, 쿠바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미국과 전쟁에서 패하면서(1903년) 쿠바 독립 이후에도 쿠바 땅이 아니게 되었다. 관타나모는 쿠바령(領)이면서 미국이 주권을 행사한다. 지금은 전세계의 ‘반미범(犯)’ 아니, 누구든 그렇게 지명된 이들이 적법 절차 없이 감금, 고문 받는 전지구인의 영토다.
아감벤은 “저들(권력)의 예외 상태가 민중에겐 해방이다. 예외 상태가 상례가 되게 하자”는 벤야민의 테제를 넘어, 일상과 비상이 구별되지 않는 공간인 비식별력(非識別域, indistinction)을 개념화한다.(341쪽) 예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인양되지 않는 바닷속 폐선에, 밀양 송전탑 위에, 왕따당한 탈영병의 총부리 앞에. 곳곳이 분향소다.
이것이 이 시대의 삶이다. 국가는 정체 모를 권력이 된 지 오래다. <호모 사케르>에 의하면 국가의 임무는 경계를 그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구제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실을 명확히 해준 아감벤은 나를 위로한다.
냉소를 거두고 말하면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대사는 조금 희망적이다. “국민이 국가입니다” 이 말은 주권재민 혹은 국민이 국가의 3대 요소라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 자체가 국가인 사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살 수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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