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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차적 인간

등록 2014-06-20 20:1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지음
여성주의 번역모임 ‘고픈’ 옮김, 인향, 2003
6시간 강의를 마치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하필 승객이 아니라 청자를 기다리던 택시였다. 기사는 “세월호의 최대 피해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며 흥분했다. “세월호는 지난 10년 정부 잘못인데 현재 대통령이 책임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우리 박 대통령만 억울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10년은 시기적으로 노무현~이명박 정권이지만 맥락상으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다. 재난은 구조적 문제의 누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사람이 현직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사건 이후 조치를 책임지고 사과하는 것,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공동체의 역량을 조직하는 것이 그의 업무다. 이번 사건에서 대통령의 잘못은 이 업무를 몰랐거나 태만,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적반하장 아니 그 이상의 괴이한 현상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 대통령을 지키자”라는 캠페인까지 당해야 했다.

자녀의 죽음, 전쟁에서의 생존, 홀로코스트, 집단 성폭력, 지진…. 정말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통만 주실까.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이는 어떤 조건에서만 맞는 말이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상부상조와 이를 지지하는 사회. 이것이 정의다.

한계를 넘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시간이 약”이어서가 아니다. 그 시간에 삶도 자아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없었던 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회복(回復)은 불가능하지만 고통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일 수도 있고, 헤어진 이들과 평화롭게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여성주의 철학자 저자 자신이 겪은 살인 미수를 동반한 성폭력을 계기로 자아 개념을 재해석한 빼어난 책이다. 번역은 유려하지만 우리말 제목은 다소 아쉬움이 있다. 원제는 <여진(餘震): 폭력과 자아의 재구성>(Aftermath: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

모든 문장이 깊고 지성이 넘친다. 그래서 치유적이다. 대개 치유를 마음의 평화나 감정적 위안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치유는 근본적으로 사고 방식의 변화로서, 인간 행동 중 가장 인지적인 과정이다. 종교든 인문학이든 일시적 ‘부흥회’로 치유가 불가능한 이유다.

아넷 바이어의 표현을 빌려오긴 했지만 저자의 요지는 사람은 “이차적 인간”(second persons)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만들어주고 돌봐준 다른 사람들의 후손이며 계승자이다.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 계속적으로 관계 맺고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곧 사회적 현상이다.(94쪽)

이차적 인간 개념은 작은 구원이 될 수 있다. 어떤 사회에 사는가에 따라 고통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크기는 객관적이지 않다. 어떤 고통이 더 심각한 고통이냐는 ‘불행 경쟁’은 논의를 왜곡시킨다. 고통의 정도는 고통의 세기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반응 능력에 달려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부분적 진실이다. 자아를 고정적,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자아들의 차이이다. 어떤 사회는 가해자를 심판하는데, 어떤 사회는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이라는 유명한 용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피해자를 괴롭힌다. 자녀의 죽음은 다른 해석이 불가능할 만큼 절대적인 고통이지만 조금이라도 삶을 덜 압도하도록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대통령이 최대 피해자”라는 발상. 고통받는 이들이 대통령을 공격한다는 사람들. 슬픔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회. 이 책에 등장하는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 ‘세월호’는 영원하지만 고통을 안은 자아는 변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이차적 존재라고 할 때 그 이차성(사회성)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그날 그 바다의 영혼들이 묻고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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