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여성과 국제정치>
안 티커너 지음, 황영주·주경미·오미영 옮김
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1
<여성과 국제정치>
안 티커너 지음, 황영주·주경미·오미영 옮김
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1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나의 최대 관심사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녹색당 출신 자치단체장이 탄생하는가이다(과천시장 서형원 녹색당 후보). ‘최초’가 아니라 ‘아시아’에서가 중요하다. ‘녹색당 시장’은 그간 국제사회에서 개발도상국의 성장 모델이었던 한국이 그 반대의 대안 사례를 배출함을 의미한다.
경기도 과천시는 ‘세월호 이후’의 희망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대다수 후보들이 안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지만 나를 포함한 유권자들은 어떤 공약이 ‘인식’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공약이 ‘유행’에서 나온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정당의 색깔이 중요한 이유다. 진정한 해결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치관 차원에서 깨달은 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몇 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90도 자세 악수 때문에 ‘꼿꼿장수’로 대중적 인기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던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은 여러 가지 자질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말 한마디(인식) 때문에 경질되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세월호 이후 사고들, 이를테면 “시체 장사”, “교통사고”, “미개 국민”과 같이 취급될 수 없다. 김장수 전 실장의 소신은 희생자에 대한 모욕과 책임 회피 차원이라기보다 지구화 시대 안보 개념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나마 ‘나은’ 태도라고 해야 할까.
그는 공부가 부족했다. 국민의 안전 보장 문제는 국가 간 갈등에 국한되며 그것은 군사적, 물리적 힘을 통해 대처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서구에서도 근대 국민국가 건립 초기의 발상이었다. 국가의 안보는 군대가 전담하고 국내 재난과 치안은 경찰 담당이라는 안전의 분업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인식에서는 ‘세월호’는 국내 문제가 된다. 국가(청와대)가 전면에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꼿꼿장수’의 관직 장수 비결은 여성주의에 있었다. 그가 <여성과 국제정치>를 읽었더라면? 저자 앤 티크너는 기존 국가 중심의 안보 개념을 비판하고 안보를 환경과 인권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선구적인 여성학자다.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첫 저서는 소규모 단위의 자립 경제(self-reliance)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 간 무역,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서는 이를 운용하는 집단의 통치와 자원 고갈이 불가피하다. 인간중심주의는 지구를 파괴하는 주범이지만, 권력이나 돈과의 관계에서는 최우선 순위여야 한다.
이 책에서 티크너는 군사 영역에 국한되지 않은 지구 안보, 환경 안보, 인간 안보 등 인류가 보호해야 할 가치를 확대하는 포괄적 안보(comprehensive security)를 제시한다.(167쪽) 그녀의 논리가 모든 문제에 “~ 안보”를 붙이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에 기초한 ‘지킴이 콤플렉스’라는 비판도 있지만, 요지는 실제로 안보 위협 세력이 누구인가이다. 전쟁은 발발 여부를 알 수 없는 미래의 문제지만, “사는 게 전쟁”이라는 말처럼 일상적 남성 폭력, 공권력 남용, 생태계 파괴, 빈부 격차는 매일매일 체감하는 안전 없는 세계다. 그러므로 “국가는 재난 통제 센터가 아니다”는 생각은 이번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선거 현수막을 유심히 읽고 오래 기억하려고 한다. “세월호를 잊지 않겠습니다”, “안전한 ××구”, 심지어 “○○의 가치를 높여 도민의 주머니를 채워드리겠습니다” 같은 놀랄 만한 내용도 있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 발전지상주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경제성장은 부패와 일부 집단의 사익을 의미했고 궁극의 피해자는 미래를 상징하는 10대였다. 이 사건은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페이지다.
포괄적 안보는 일부 인간으로부터 모든 인간과 환경을 지키자는 요구다. 국가권력과 부패자본으로 인한 피해는 일상적, 직접적으로 광범위한 살상을 낳는다. 국가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안전 개념만이 국가도 사람도 살린다. 노란 리본을 달면서 느끼는 이 바닥 모를 무기력이 변화로 이어지려면 개인, 국가, 지구의 안전을 동등한 가치로 인식해야 한다. 안전에 대한 위계적 인식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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