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점 술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장자>-‘지락’(至樂))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를 곱씹으며 생각한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너를 길들이려고 한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너와 대화한 것이 아니다. 너의 존재방식에 섬세하게 깨어 있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너에게 악수를 청했다고 해도 나는 너와 소통한 게 아닐 것이다. 좀더 강력하게 말하자면, 그런 태도는 비록 사랑을 말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억압하고 죽인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정치가, 현장과 소통하겠다는 행정가, 직원과 소통하겠다는 최고경영자(CEO), 학생과 소통하겠다는 교사, 자녀와 소통하겠다는 부모, 어떤 위치에서든 힘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불행해진다. 숟가락 쥐듯 손쉽게 소통과 화합을 혀끝에 올리지 말라. 타인과 진심으로 연결되기 위해선 먼저 나의 욕망을 비워야 한다. 마음의 귀를 쫑긋 세워 작고 여린 소리들까지 광대역으로 수신할 것.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김선우 시인·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