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앞에 서 있는 잠깐 동안 욕을 엄청 들었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셋의 대화. 절반이 욕이다. “새끼, 웃기지 않냐?” “씨발, 재섭써.” “병신, 닥치고!” 등등. 아이들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쐐 하게 아프다. 아이들이 욕을 해서가 아니라 욕이 이미 욕이 아니게 되어서 슬프다. 표현의 욕망을 담는 게 말이고 욕도 자연스러운 말의 일부를 이룬다. 막힌 곳을 터주는 적극적인 감정 표현으로서의 욕. 자기치유의 욕망을 가진 말이라는 점에서 욕은 유용하다. 그러나 습관이 되어버린 헛욕은 그 욕을 뱉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입말에 욕이 남발되는 것은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이라도 해서 억눌린 정서가 해소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출구 없는 시험지옥을 견디는 아이들에게 욕은 오히려 권할 만하겠지만, 카타르시스가 사라진 습관적인 욕은 불필요하게 늘어난 헛껍데기 음절덩어리들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욕은 친할머니의 것이다. “새 뒤집혀 날아가는 소리!”, “귀신이 잡아가 아작아작 뼈째 씹어 먹을 놈!” 이런 욕들엔 발견의 기쁨과 상상의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아, 새는 몸을 뒤집은 채 날 수 없구나. 그런 발견은 하늘을 한번 다시 보게 하고 구름 속을 드나드는 새들의 이름을 궁금하게 했다. 귀신에게 잡혀가 아작아작 씹히는 ‘그놈’을 상상하면 몸과 마음의 감각이 통쾌해지지 않겠는가.
김선우 시인·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