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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우의 빨강] 붉은 피

등록 2014-05-21 18:15수정 2014-05-29 10:54

식물들의 피 색깔은 다양하다. 민들레 줄기를 꺾으면 흰 피가 나오고, 애기똥풀 줄기를 꺾으면 노란 피가 나온다. 한련초를 꺾으면 검은 피가 나온다. 인간은 식물처럼 다양한 피 색깔로 진화하지 못했다. 핏빛을 ‘따로 또 같이’ 다채롭게 분화시키기엔 포유동물 세계의 적자생존 분투기가 고단하고 치열했으리라. 생존해야 한다는 집념과 고독, 생존 너머의 삶의 품격을 꿈꾸는 자유에의 갈망이 인간의 붉은 피 속에 이글거린다. 뜨겁고 불온한 붉은 피.

고대 로마에서는 귀족들이 뻑적지근한 연회의 마지막에 은식기들을 테베레 강에 던져 버리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 더 많은 은식기를 던질 수 있는 자가 더 부자라는 증명이었다. 귀족과 은식기는 계급과 부를 나타내는 오래된 단짝 조합. 중세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푸른 피’(blue blood)라 부르게 된 데엔 늘 은그릇에 식사를 해온 그들의 피부가 희푸르게 침염된 탓도 있을 터. 햇볕에 그을리며 힘든 노동을 할 일 없는 창백한 백색 피부에 도드라진 푸른 혈관, 거기에 백인 순혈주의까지 더해진 푸른 피의 계급은 자기들 식의 ‘고귀’를 오랜 세월 포장했다.

귀족을 선망하면서 타락하지 않기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창백한 푸른 피의 가면을 집어던질 것. 그 누구랄 것 없이 인간은 똑같이 붉은 피를 가졌다. 개개인의 고유하고도 평등한 생명의 힘을 찾아 모험을 떠나자. 바람이 불어온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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