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문학평론가
세월호 참사 한 달이 가까워온다. 온 국민이 비통에 잠겨 새 뉴스가 전해질 때마다 더 큰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재난 앞에 몇 번이고 같은 탄식을 되풀이하게 된다.
지난 한 달 우리가 경험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껍질이 매일 한 겹씩 벗겨지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벗겨지는 순간의 아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속살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실상 그동안 껍질만은 번듯하다고 여겨왔다. 언필칭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 자랑이었다. 하긴 뭐, 그 말이 아주 허풍인 건 아니다. 나처럼 궁핍이 일상이던 시절에 농촌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2, 30대 한창때를 박정희 18년에 몰수당한 세대에게는 오늘 이 정도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라는 약간의 자기중심적 정서가 있다. 도심의 화려함과 화면 속의 풍요가 내 것이 아님에도 시각적 반복에 저절로 세뇌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사건 발생의 뿌리에서부터 사고 수습이 지체되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통해 나라의 몸통을 구성하는 주요 부위들이 거의 예외 없이 부정과 비리, 편법과 무책임,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차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다. 공공의 행정과 사익의 추구가 뒤얽힌 그 여러 단계 중 어느 한 군데에서만이라도 제대로 점검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기능이 작동했다면 저 꽃다운 목숨들의 기막힌 희생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경과, 처리와 후유증을 근본적이고 종합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국가 차원의 중립적 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하리라 본다.
물론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과업은 이런 참사가 일어날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나라의 기본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돼야 한다는 말인데, 누구나 느끼는 지당한 말씀이기에 정치가마다 급해지면 입에 올리는 상투적 처방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만 하더라도 ‘국가개조’라는 화두를 꺼낸 바 있다. 어떤 분은 그 말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가 연상된다 했고, 다른 분은 일본 우익의 용어라는 점을 지적했다. 나는 오히려 50여년 전 아버지 박정희의 ‘국가재건’을 떠올린다.
하지만 문제는 용어가 아니다. 용어에 담긴 본연의 취지가 나쁜 것은 아닐 게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말들은 정치적 책략을 함축한 기만적 수사였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가령, 박정희의 ‘국가재건’은 이전 정권, 즉 장면 정권이 나라를 망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선전의 언어였다. 장면 정부가 쿠데타를 제압할 만큼 유능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려 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박근혜의 경우는 어떤가. ‘잘못된 적폐’ ‘잘못된 관행’을 탓함으로써 그는 책임을 과거에 떠넘기는 아버지의 수법을 이어받고 있다. 사실 그가 말하는 ‘국가개조’는 대선 때의 구호인 ‘시대교체’의 연장선 위에 있고 어떤 점에선 재야의 ‘2013년 체제론’과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집권에 성공하자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이명박 시대의 친기업정책으로 돌아갔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이 효율과 이윤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대통령 자신의 국정철학에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박근혜 정부의 자발적 정책전환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수밖에 없다. 본래 민주주의란 인민이 스스로 자신들 삶의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도록 제도화한 것인데, 다만 오늘날에는 대표를 뽑아서 그렇게 할 뿐이다. 대표가 말을 안 들으면 그때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한 권리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 스스로가 다스리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불변의 원칙이다. 세월호 참사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은 참된 민주의 실현뿐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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