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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염무웅 칼럼] 상처꽃, 모란꽃, 남매꽃

등록 2014-04-13 18:48

염무웅 문학평론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1969년 5월 초 혜화동 내 하숙집으로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찾아왔다. 잠깐 같이 가자는 거였는데,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따라간 곳은 중구청 맞은편의 허름한 2층 건물로, 알고 보니 중정(중앙정보부) 분실이었다. 어느 방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기도 전에 불문곡직 몽둥이가 날아왔다. 겁박을 하고 나서 그들이 다그쳐 묻는 것은 별게 아니었다. 대학 동기 한 사람의 소재를 대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치고 얼러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결국 나를 대기실 같은 넓은 방으로 내보냈다. 거기에는 벌써 그 친구의 고교 동창 여러 명이 잡혀와 매타작을 당하고 뻗어 있었다. 그중에는 그의 고교 동창이자 내 대학 동기인 소설가 이청준도 섞여 있었다.

열흘쯤 시달린 뒤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신문마다 1면 머리기사로 ‘유럽·일본을 통한 북괴 간첩단 사건’이라는 중정 발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것이다.(1969.5.14) 김형욱 중정 부장의 기자회견, 관련자 60명, 현직 국회의원 김규남 포함, 동베를린 거쳐 평양 왕래, 공작금 갖고 반미·민중봉기 획책 등 무시무시한 내용이 관련자 사진 및 조직도표와 함께 온통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내 친구는 도망을 쳤다가 두 주일 만에 붙잡혔는데, 그사이에 친척·친구들이 닦달을 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교수였던 국제법학자 박노수와 국회의원 김규남은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두어 주일 뒤에 사형이 집행되고, 내 친구들은 7년형, 5년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작년 가을 “서울고법 형사2부는 박 교수와 김 의원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한겨레> 2013.10.8)

지난 주말 연극 <상처꽃 - 울릉도 1974>를 보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수십 년 시차를 넘나들어야 했다. 옛 하숙집과 극장은 걸어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내 무의식의 시간 속에서는 45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연극의 소재는 1969년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사건과 너무나 흡사했다. 즉 1974년 3월 발표된 이른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었다. 지난번에도 아무 관계 없는 두 사건을 합쳐 ‘유럽·일본을 통한 간첩단 사건’이라고 부풀렸듯이 이번에도 전혀 상관없는 두 사건을 합쳐 ‘최대 규모’라고 발표했는데, 이렇게 한 까닭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가 유신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한겨레> 2014.3.21)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건에서도 3명이 사형되고 20여명은 1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이들 역시 2012년부터 재심을 통해 차례로 무죄를 선고받고 있다.

그런데 연극 <상처꽃>은 사건의 진실을 파고드는 법정드라마가 아니라, 영문 모르고 끌려가 가혹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어 인생을 망가뜨린 분들의 맺힌 한을 드러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심리극이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서사극과 마당극의 결합으로서, 그림·노래·율동·만담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상처꽃>은 광주의 연극인 박효선(1954~1998)이 연출했던 <모란꽃>(1993)과 대조적이면서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다. <모란꽃>도 서사극의 형식으로 광주항쟁 때 시위에 참가했던 여성이 계엄군에게 잡혀가 ‘남파간첩 모란꽃’이라 자백하도록 수사관에게 강압당하는 과정을 개인적 심리치유의 차원에서 그린 수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이다. 과거의 일부 조작사건들이 재심을 통해 뒤집히고 있음에도 현실에서는 새로운 한과 상처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고문 대신 문서조작이 그래도 개선된 것인가. 나는 물론 유우성이라는 사람의 실체적 진실에 관해 알지 못한다. 느낌에 그는 코리안드림을 안고 이 땅에 왔고 시청 공무원이 됨으로써 꿈을 이루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 성공이 그에게 과욕과 착각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국가권력이 그들 동포 남매를 그처럼 집요하게 괴롭혀도 되는지 의문이다. 그들 가슴에 쌓이는 한을 언젠가 무대 위에서 남매꽃이라고 부를 날이 오지 않을까.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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