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문학평론가
작년 <극장국가 북한>의 공저자로 화제에 올랐던 권헌익 교수의 다른 책 <또 하나의 냉전>을 뒤적이다가 가슴 뜨거워지는 대목을 만났다. 권 교수는 냉전의 다층성이라는 자신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이 피 톰슨(1924~93)의 팸플릿 <냉전을 넘어서>(1982)에서 화두를 가져오는데, 톰슨에 따르면 그의 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장교로 불가리아에서 빨치산 활동을 돕다가 파시스트에게 체포돼 처형되었다. 죽기 전해인 1943년 형은 톰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유럽을 조국이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크라쿠프나 뮌헨이나 로마나 마드리드를 모두 고국의 도시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위해서는 영국에 대한 조국애를 초월하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단다.”
톰슨의 형 프랭크 톰슨이 참전한 것은 단지 자기 나라에 대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절실하게 원한 것은 국경을 넘어선 인류적 가치의 구현이었다. 유럽 여러 민족들이 모두 자유롭게 힘과 재능을 발휘하여 협동과 창의를 이룩한다면 얼마나 멋진 유럽이 만들어질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그는 체포 직전의 다른 편지에 적으면서, 자기가 유럽을 말하는 것은 잘 아는 대륙이 유럽뿐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을 건 작전의 수행 중에도 적국의 도시 이름에서 ‘고국의 도시’를 느낄 수 있었던 프랭크의 고결한 감수성은 틀림없이 아우 톰슨에게 평생 동안 학문과 실천을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 톰슨의 젊은 감수성이 이상주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목숨을 바쳤던 발칸반도에서, 그리고 유럽과 지구 여러 곳에서 그 후 전개된 무자비한 현실은 그의 순진성을 비추는 거울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이 그렇다. 이곳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점령군과 그리스 독립운동세력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지만, 독립운동 내부에서도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유혈갈등이 일어났다. 이미 내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전 후에는 더욱 잔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내전(1946~49)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내전을 통해 좌파세력을 철저히 소탕하고자 한 반면에, 스탈린의 러시아는 얄타회담에서 그리스를 서구 영향권에 두기로 합의한데다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력부대인 공산주의자들이 티토 노선을 선호했기 때문에 학살을 방임했다. 오히려 스탈린은 내전 초기 그리스 좌파에게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시기 그리스 전 국토에서 자행된 악몽의 기억들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와 테오도라키스의 음악 및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스며들어 오늘도 우리의 양심을 향해 묻는다. 왜 이상은 현실에 패배하는가.
알다시피 그리스 내전이 유럽 냉전의 신호탄이었다면 뒤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냉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냉전’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어도 그리스인과 한국인에게는, 아니 베트남인에게도 역사적 진실에 대한 착오를 유도하는 것일 수 있다. 혹독한 전쟁으로 수백만 사상자가 발생한 사태를 ‘냉전’이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어가 이 나라들에만 적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52년 이란에서,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1973년 칠레에서도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 일어났다. 이에 균형을 맞추듯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의 폭동이, 1956년 헝가리 봉기가, 그리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실험이 소련 탱크에 짓밟혔다. 그렇기에 권헌익 교수가 제안하듯 주류국가들 간의 불안한 평화체제를 글로벌한 관점에서 파악하되 경계선 안과 밖에서 발생한 미시적 충돌들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역사를 잠시만 돌아보더라도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귀속은 이상주의의 폐허 위에서 이루어지는 악마들 간의 거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세계사의 물줄기가 크게 용틀임하면서 튀어오른 하나의 물방울인지도 모르지만.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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