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감꽃’,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지음, 창비, 1977
‘감꽃’,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지음, 창비, 1977
시인은 스물두살, 1970년에 이 시를 발표했다. 시 ‘감꽃’의 전문이다.(10쪽) 시인도 알았을 것이다. “먼 훗날”인 지금, 우리가 죽은 사람의 숫자를 세고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국정 교과서 체제여서 지금처럼 여러 버전의 시집이 많지 않았다. 내 기억엔 당시 <한국의 명시>(김희보 편저)라는 책이 유명했다. 감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나는 “감잎을 돈처럼 셌지”라고 읽곤 했다.
“나는 전혜린”이며 예술가는 모두 백혈병으로 죽는 줄 알았던 감상적 문학소녀에게 ‘감꽃’은 꽃과 시에 대한 관념에 일격을 가했다. 시에 “죽은 병사의 머리”, “침”, “돈”이 웬 말인가. <참깨를 털면서>의 다른 시들을 읽으니 이 시는 ‘고상한’ 편에 속했다. ‘감꽃’과 다른 측면에서, 남정현의 <분지>를 연상시키는 시들이 많았다고만 해두자.
봄이 왔는가? 꽃 이야기로 안부 인사를 전하는 이들이 많다. 친한 친구들은 내가 외출을 꺼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밖에 나가 꽃구경을 하라”고 권한다. 나는 그들의 낙관이 이해되지 않는다. “꽃구경은 무슨…” 언제부터인가 봄은 내게 황사의 계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 해 전 내가 사는 동네에 단독 주택들이 오피스텔이나 연립주택으로 일제히 증축 공사를 벌일 때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좁은 동네에 건축 현장의 먼지에다 인구 폭발의 공포가 엄습했다. 1~2가구가 최소 10가구 이상이 되는 것이다. 흙먼지가 옷에 묻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요즘의 미세 먼지는 그냥 공기다.
이제 봄은 이어령의 표현을 엉뚱하게 가져오면 “흙속에 저 바람 속에”일 뿐이다. 봄기운, 봄 냄새, 봄밤의 정취… 이런 거 없다. 중국과 가까운 제주도는 대륙에서 불어오는 황사 때문에 일부 지역엔 지붕에 두터운 먼지가 또 하나의 지붕으로 얹혀 있을 정도다.
꽃? 오래된 아파트는 나름 좋은 점이 있다. 1층인 우리 집 앞 화단은 남들 보기엔 꽃밭 천국이다. 나무를 심은 지 오래되어 뿌리는 깊고 가지는 왕성하며 각각의 꽃봉오리들은 뭉테기로 육중하다. 분홍색, 옅은 분홍색, 자주에 가까운 빨강색, 흰색이 빽빽이 어우러진 철쭉의 개화는 안정감이 없다. 햇빛이 좋은 날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식물이 동물보다 ‘우월’하다. 동물은 다른 생물체를 없애야만(죽여야만)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있지만, 식물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철쭉나무 아래를 불안스레 왔다갔다하는 털 빠지고 더러운 노숙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그와 동일시된다. 병든 동물보다 시든 식물이 ‘나은’ 것은 물론이요, 지금 철쭉의 현란함은 육식 식물을 연상시킨다.
이 시는 꽃과 돈 그리고 그 둘이 상징하는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꽃과 돈은 언뜻 미추로 대비되어 보이지만, 같은 “다발”이라는 단어와 붙어 다닌다. 돈 가는 곳에 꽃이 간다. 그렇지 않은 꽃은 시선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 홀로 흔들리는 코스모스 정도다.
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인간은 꽃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만들었다. ‘꽃다운 청춘’은 경쟁하다 피기 전에 잉여가 되거나, 돈만 세는 세상에서 수학여행 중에 익사하거나, 폭력 가정에서 너무 일찍 진다. 나는 예전부터 동백꽃이 예사롭지 않았다. 꽃잎이 낱낱이 지지 않고 봉오리 채 댕강 떨어지는 동백은 효수(梟首)를 연상시킨다. 내게 동백은 전봉준이요, 제주 4·3의 민초들이다. 연인들이 기념일에 챙기는 장미꽃다발은 진부함과 편집증을 상징한다. 모두 아름답지 않다.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에는 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한국의 ‘인권-진보’ 진영은 장기수 출소 기념행사에서 40년을 복역한 이에게는 큰 꽃다발을, 38년은 그보다 작은 꽃다발을 걸어준다. 그러니까 복역 연수에 따라 금은동 메달로 꽃다발에 차등을 둔 것이다.
꽃이 꽃답지 않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어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봄이 간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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