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마음으로 <맹자>를 펼친다. 그는 말한다. “내가 물고기도 좋아하고 곰발바닥도 좋아하지만, 둘 다 먹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포기하고 곰발바닥을 먹을 것이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로움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살길 바라지만 삶보다 더 귀한 게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 않는다. 죽는 게 싫지만, 죽음보다 더 싫은 게 있기 때문에 환란을 피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만약 사람에게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면,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 싫은 게 없다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무슨 수단이든 다 쓰지 않겠는가? 삶보다 더 귀한 게 있기 때문에,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게 있기 때문에, 환란을 피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맹자는 삶을 버려서라도 의로움을 구하는 것을 ‘사생취의’(舍生取義)라고 했다. 반대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구차투생’(苟且偸生)이라고 한다.
목숨을 버리는 대신 욕된 삶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사마천은 한무제 때 부당하게 궁형을 당하고도, 가업인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자결 대신 치욕을 견디는 삶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그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운 이도 있고, 기러기 깃털보다 가벼운 이도 있다.”(人固有一死, 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 그래서 주희는 말한다. “사는 게 의롭다면 죽음을 버리고 삶을 취하며, 죽는 게 의롭다면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한다.”(義在於生, 則舍死而取生; 義在於死, 則舍生而取死.) 의로움을 추구한다면 삶도 죽음도 가볍지 않다.
무리하게 개축한 선박의 난파와 선장이 승객을 버린 재앙의 배후에는 자본의 탐욕과 공생해온 관료사회의 모럴 헤저드가 있다. 국가조직이 증거를 조작해도 책임지는 이 없는 나라, 대통령의 복지와 경제민주화 공약이 일년 만에 휴지로 변해도 멀쩡한 이 나라에서 의로움을 논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나라 안에 사생취의의 기상이 죽었다는 게 우리를 더욱 서글프고 절망스럽게 만든다.
이상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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