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편집인
<조선일보>가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로 한국신문협회가 주는 ‘2014년 한국신문상’을 받게 됐다. 축하할 일이다. 문창극 한국신문상 심사위원장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 용기”라며 “조선일보 편집국은 그런 용기를 보여줬다”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용기 있는’ 조선일보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보도 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조선일보의 ‘혼외 아들’ 보도가 있기 석 달 전쯤, ‘혼외 아들’로 지목된 채아무개군의 개인정보 수집에 국가정보원은 물론 청와대까지 총동원된 사실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6월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국정원과 청와대 총무비서관실을 비롯한 민정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교육문화수석실 등에서 채군의 개인정보 확보에 나섰다. 한마디로 정권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채 전 총장 ‘혼외아들설’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9월6일 조선일보가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숨겼다’는 보도를 했고, 그 뒤 일주일 만에 채 총장은 사퇴를 표명하고 검찰을 떠났다.
검찰 수장으로서 당시 채 총장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채동욱팀’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8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정황을 잡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6월11일 기소했다. 원 전 원장의 유죄가 확정되면 지난 대선은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였음이 확인되고, 박 대통령의 정통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권 차원에서 볼 때 채 총장은 그대로 둘 수 없는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조선일보 보도로 채 총장은 부도덕한 권력자로 낙인찍힌 채 옷을 벗었다.
그처럼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용기 있게 보도했던 조선일보가 채 전 총장보다는 훨씬 막강한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해 4월24일, 조선일보는 이례적으로 기명 칼럼을 1면에 배치하며 노골적으로 국정원을 감쌌다. 이 칼럼은 “국정원 김씨는 대선 전 4개월간 댓글 120개를 달았다. 하루 평균 한 개꼴로 한두 줄짜리 짤막한 댓글을 올린 것이다”며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실을 애써 축소했다. 그 이후 대선 관련 국정원의 트위트글이 100만개가 넘어서는 등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자세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채 전 총장의 혼외 아들이야 한 권력자의 개인적인 탈선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더욱이 현 정권은 채 전 총장을 비롯한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팀을 사실상 해체하는 등 18대 대선 부정 수사와 재판 자체를 방해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국헌 문란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과감하게 보도했던 조선일보의 그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가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채 전 총장의 ‘혼외 아들’을 확인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채 전 총장이 18대 대통령 선거 부정이라는 국기문란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권력자의 탈선에 눈감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기관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더욱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최대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용기 있는’ 조선일보에 권한다. 채 전 총장의 사생활 캐기에 들이는 용기와 노력의 10분의 1만이라도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와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밝히는 데 사용하기를.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혼외 아들’ 보도는 권력자의 탈선에 대한 용기 있는 비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한 ‘청부 보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영향력 1위 신문이라고 자부하는 조선일보가 국가 권력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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