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전화’, 마종기, <마종기 시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전화’, 마종기, <마종기 시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라는 영화에는 1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여성(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을 감독하는 보호관찰관이 나온다. 그는 늘 “오리노코 강에 여행 가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고 말하지만 자살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5분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여주인공의 기막힌 사연만큼이나 마음에 남았다. 나는 남자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자살할 것을 알았다. 사는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눈빛이었다.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과 이덕자의 <어둔 하늘 어둔 새>는 모두 북미 이민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내게 외로움의 색깔을 알려주었다. 해진 뒤의 그랜드캐니언과 너무 높아서 푸른 밤하늘. 그곳에서 시인 마종기는 이민자로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다. 그의 유명한 시, ‘전화’다(172쪽, 원문 그대로 표기). 1976년에 출간된 <변경의 꽃>에 실렸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전화를 건다. 그런데 상대방이 받을까봐 두려운 전화다. 이 시를 감상하려면 ‘옛날’ 집 전화기를 알아야 한다. 대개 검은색의 무거운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린다. 발신번호도 알 수 없고 응답 메시지 기능도 없다. 그런 전화만 발신자를 숨긴 채 소리를 계속 울리게 할 수 있다. 외로움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지만 내겐 이 시만한 외로움이 없다. 외로움에도 고립, 좌절, 무기력 등 여러 가지 감촉이 있다. 이 시는 간절한 외로움이다. 촉각과 청각의 공감각(共感覺)이 뛰어난 ‘전화’ 소리에 몸이 젖는다. 읽고 또 읽노라면 외로움이 몸에 가득 차서 손목이라도 그어 몸 안의 외로움을 빼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가 곧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과 타인의 존재는 관련성이 없지 않다. 관계가 형성되면 나는 타인과 섞이고 동시에 확장된다. 외로움은 무균, 증류수 같은 결정(潔淨)적이고 결정(結晶)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관계는 그 단단함과 순결성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등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 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몸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공간을 사는 방법은? 보내지 못한 편지, 멀리서 바라봄, 생각, 생각, 생각… 나는 열등하므로 통화는 위험하다. 받지 않을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만이 행복과 안전을 동시에 보장받는 길이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그/그녀를 빠뜨린 소리에 함께 익사(溺舍)하고 싶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불가능하다. 대신 나는 편지를 잔뜩 써 놓고 임시보관함에 넣어 둔다. 비록 선상(온라인)이지만 외로움이 거처할 곳이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존이 아니다. 혼자 모니터를 바라본다.
다시 전화를 꿈꾼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나 대신 상대의 몸에 “쏟아지고 비벼대고 지켜볼 것이다”. 관음증은 약자의 사랑법이다. 시 ‘전화’는 관음마저 상상한다. 이렇게라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오리노코 강에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자살하는 것보다는.
정희진 여성학 강사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전화를 건다. 그런데 상대방이 받을까봐 두려운 전화다. 이 시를 감상하려면 ‘옛날’ 집 전화기를 알아야 한다. 대개 검은색의 무거운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린다. 발신번호도 알 수 없고 응답 메시지 기능도 없다. 그런 전화만 발신자를 숨긴 채 소리를 계속 울리게 할 수 있다. 외로움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지만 내겐 이 시만한 외로움이 없다. 외로움에도 고립, 좌절, 무기력 등 여러 가지 감촉이 있다. 이 시는 간절한 외로움이다. 촉각과 청각의 공감각(共感覺)이 뛰어난 ‘전화’ 소리에 몸이 젖는다. 읽고 또 읽노라면 외로움이 몸에 가득 차서 손목이라도 그어 몸 안의 외로움을 빼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가 곧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과 타인의 존재는 관련성이 없지 않다. 관계가 형성되면 나는 타인과 섞이고 동시에 확장된다. 외로움은 무균, 증류수 같은 결정(潔淨)적이고 결정(結晶)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관계는 그 단단함과 순결성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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