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지음
차승기, 홍종욱 옮김, 역사비평사, 2009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지음
차승기, 홍종욱 옮김, 역사비평사, 2009
3월과 8월. 삼일절과 광복절을 잘못 기억하면 우리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된다. 지배자는 자기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약자를 좋아한다. 그것이 권력의 맛이다. 아베(安倍)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가 뭐라 ‘지껄이든’, 어떤 의미에서 무관심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어차피 전쟁이 나도 한일전이 ‘아니다’. 나토(NATO)를 제외하면 세계 1, 2위 미군 주둔국인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이 싸울 테니까.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나오키의 저작은 단독 저서만 7권 정도 출간되어 있다. 관심 있는 이들에겐 <번역과 주체>(후지이 다케시 옮김)를 권한다. 번역이 어떻게 ‘외국’과 ‘우리나라(주체)’를 만들어내는가를 분석하여 민족주의의 쌍(雙)형상 형성 과정을 보여준 그의 대표작이다.
좀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西谷修)와 나오키의 대담집으로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부제)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논쟁거리는 여전히 ‘상상 속의 미국’이지만, 두 사람은 자기 사회의 거울 앞에 선다.
나는 한국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주변성에 대한 무지와 공포, 중심에 대한 열망에 비해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장 세계화와 국민국가 중 ‘미야코지마에서 본 세계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미야코지마(宮古島)는 오키나와 본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섬으로 일본 본토는 물론 오키나와와도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키나와는 내부 식민지로서 일본의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참화와 멸시를 겪어왔다. 그런데 미야코지마는 ‘식민지의 식민지’다. 오키나와는 자신이 당한 본토로부터의 차별을 미야코지마를 상대로 반복했다. 굳이 비교하면, 전라도와 제주도의 관계와 비슷하달까.
미국 > 도쿄 > 도쿄 외 내지(內地) > 오키나와 > 미야코지마의 서열 속에서 미야코지마는 일본의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미야코지마가 관광업을 통해 미국과 곧바로 연결되면서부터 기존 ‘단계’는 간단히 무시되고 더 이상 변방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도쿄보다 미국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더 가까운 세계화의 첨단이다. 강자(도쿄)보다 더 강자(미국)를 가까이함으로써 주변성을 극복하자는 논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야코지마 내부에서 기존의 중심을 상대화할 수 있는 시각이 생성되었다는 점이다.(52~57쪽)
“현재는 비서구의 옥시덴탈리즘이 서구중심주의를 지탱하고 있다.”(9쪽) 주변이 주변인 것은 상황이 변했는데도 자기를 억압하는 기존의 위계를 스스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갖가지 중심(부자, 미국, 남성, 서울…)을 섬기고 약자와 약한 기미가 보이는 이들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중심 지향의 인간 심리는 권력에 대한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함이 악한 경우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그들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주변과 중심은 경계는 유동적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탈정치적이다. ‘극일’은 쉽지 않다. ‘일본’은 다양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중심과 일본의 중심은 “일본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실을 상기하는 것에서부터 ‘독립’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