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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아마도 증거가 있지 않을까?

등록 2014-02-17 18:30수정 2014-03-04 17:30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북송이 멸망당한 해인 1126년, 20대 청년인 악비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금나라와 수백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고, 양자강 일대를 장악해 금의 남하를 막았다. 금나라로서는 악비가 눈엣가시였기 때문에, 남송과 강화를 맺는 조건으로 악비의 제거를 요구했다. 남송의 간신 진회는 악비와 그의 아들 악운과 장헌 등이 반란을 꾀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조정에서 악비를 옹호한 신하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진회는 악비 등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했지만, 반란을 꾀한 증거물이라는 편지는 나오지 않았다. 악비와 함께 금에 맞서 싸웠던 은퇴 노장 한세충이 나서 진회에게 따졌다. “대체 악비가 반란을 꾀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진회는 “막수유(莫須有)?”라고 답했다. ‘아마 있지 않을까?’라는 뜻이다. 한세충은 “‘막수유’라는 세 글자로 어찌 천하를 설복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항의했지만, 진회는 악비, 악운, 장헌 등을 모두 살해했다. 감옥지기 외순은 악비의 주검을 몰래 빼내 성문 밖 사당 옆에 옥가락지와 함께 묻었다. 훗날 영웅의 복권을 기다리며.

‘막수유’란 말과 쌍벽을 이루는 말은 명나라 때 매우 닮은 상황에서 나왔다. 1449년 몽골의 오이라트가 명나라를 쳐서 영종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 수많은 신하들이 남쪽으로 도망칠 것을 주장했지만 우겸만은 베이징을 지켜야 한다며 오이라트에 맞섰다. 훗날 영종이 돌아오자 간신 서유정과 석형 등은 우겸이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했다. 아무리 털어도 우겸의 죄상이 나오지 않자 서유정은 “의욕”(意欲)이라고 말했다. 비록 증거는 없지만 “(우겸의) 뜻은 (반란을) 꾀하려 했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킨 우겸은 ‘의욕’ 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해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막수유’와 ‘의욕’ 수준의 심증으로 ‘유서 대필’이라는 해괴한 누명을 썼던 강기훈씨가 23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정의는 아직 실현된 게 아니다. 조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물증인 중국 출입국 기록은 위조로 밝혀졌다. 한국은 아직도 ‘막수유’와 ‘의욕’의 나라이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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