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노나라의 대부 숙손표가 외교 사절로 강대국인 진나라를 방문했다. 진의 권력자인 범선자가 숙손표를 맞이해 불쑥 물었다. “옛말에 ‘죽어도 썩지 않는다’(死而不朽)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숙손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범선자는 자기 조상들이 순임금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오래 권력을 장악해왔는지 자랑한 뒤, “현재도 범씨 가문이 맹주 노릇을 하니, 이게 바로 죽어도 썩지 않는다는 말의 뜻”이라고 했다. 숙손표는 기죽지 않고 반박했다. “제가 듣기에 그것은 권력 세습이지 ‘불후’(不朽)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불후의 최상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고, 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이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덕과 공과 말이 오랜 세월을 견뎌 사라지지 않을 때, 그것을 일러 불후라고 합니다. 자기 성씨와 종묘를 보존하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건 어떤 나라든 다 하는 일입니다. 벼슬이 제아무리 높아도 그걸 불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비 세대의 벼슬을 이어받아 권력을 자랑하는 행위는 불후의 세계와 거리가 멀다. 숙손표에 따르면 덕과 공을 세우는 실천이 좋은 말 남기는 것보다 앞선다. 좋은 말보다 좋은 일화를 남기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말은 누가 대신 적어준 것을 읽거나 외워서 할 수도 있지만, 좋은 일화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배어나온다. 한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살아서 덕을 쌓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한들 누가 그의 삶을 기억하겠는가? 죽더라도 썩지 않을 덕행을 남긴다면, 아무리 요절한다 한들 누가 그를 잊겠는가?”(生而不淑, 孰謂其壽? 死而不朽, 孰謂其夭)
남이 해준 메모를 읽는 대신 수첩에 메모해두고 싶을 만큼 진정성이 담긴 말을 하는 정치인, 좋은 말을 넘어 좋은 일화를 남기는 지도자가 보고 싶다. 좋은 말은커녕 교과서 논란의 말문을 막기 위해 국정화를 추진하는 걸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불통 정치의 근절을 위해,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선출 정치인은 매년 한 번 이상 각본 없이 라이브로 국민과 대화할 것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만들면 어떨까.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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