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유정완·이삼출·민승기 옮김, 민음사, 1992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유정완·이삼출·민승기 옮김, 민음사, 1992
나는 이제까지 ‘운명철학관’에 세 번 가봤다. 모두 ‘용한(비싼)’ 곳으로 선배들이 동행을 요청해서 옆에서 구경했다. ‘어르신’들이 나까지 덤으로 서비스를 해주었는데 세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나의 잡다한 과거와 집안 내력을 모두 맞혔고 진로 제시도 같았다. 관상은 삶이 몸에 체현된 과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미래가 궁금해서 ‘점쟁이’(fortune-teller)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점술가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몸을 보고 과거를 말해준다. 찾아간 사람도 과거나 현재의 마음 상태를 짚어줄 때 “용하다”고 평가한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므로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未來)는, 오지 않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잡스, 드러커, 토플러 등 혁신가들의 말대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방법은 직접 실현하는 일뿐이다.(하지만 ‘의지의 실현으로서 미래’가 근대성의 핵심이고 비인간성이다.)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事後)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當時)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고,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가장 첨예한 쟁점은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해석에 있다. 프랑스어에서 시작된 용어가 영문학에서 주로 연구되었으니 그 차이에다 영어의 포스트의 의미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후(以後), 탈(脫), 반대, ~ 넘어서, ~ 뒤에…. 시간적 의미에서는 후에 오는 것 같지만, 공간적으로는 뒤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므로 이전(以前)을 뜻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한국의 현재는 미국의 80년대와 같다’는 사고가 그렇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착오, 시기상조” 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圓)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rapport sur le savoir/a report on knowledge)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리오타르의 주장은 서구가 독점했던 단일 주체의 단일 시간에 대한 성찰이다.
하지만 사실과 언어의 불일치는 본디 당연한 것이다. 이 혼란이 민주주의이고 탈식민주의다. 서구가 ‘지리상의 발견’을 했다면 우리는 발견된 ‘것들’인가? 근대의 주체가 개척하는 인간이라면, 개척당한 자연은 근대의 타자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모던의 기준이 백인 남성이라면, 흑인이나 여성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존재가 된다.
포스트는 실제 이후가 아니라 인식 이후를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기존 역사를 혼란시키기 위한 것으로 모던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개념을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성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근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생성되는 근대이다.”(177쪽)
어느덧! 하루는 지루한데 일주일은 빨리 가고 일 년은 더 빨리 갈 때가 있다. 이처럼 시간은 저절로 ‘가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붙잡을 것인가, 따라잡아야만 하는가. 이는 고달픈 삶일 뿐 아니라 불공정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않다.
포스트는 전후의 문제가 아니다. 포스트에 대한 사유는 전진하는 시간에 태클을 건다. 시간을 따라잡기보다 따돌리자. ‘지금 여기’에 ‘가는 시간’을 넘어뜨려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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