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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 들리는가,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 정영무

등록 2013-12-31 19:14수정 2014-01-02 11:52

정영무 논설위원
정영무 논설위원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2주갑이다. 12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1894년 1월10일 새벽 전봉준은 배들평야에서 죽창으로 무장한 1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로 쳐들어간다. 멀쩡한 보가 있는데도 새로 만석보를 높이 쌓아 물세를 뜯어내던 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고자 했으나 조병갑은 도망을 갔다. 농민군은 감옥의 죄수를 풀어주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한 뒤 자신들의 강제노역으로 쌓은 탐욕의 만석보를 허물었다. 그 한없이 뜨겁고 깊디깊은 해원과 감격의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눈 쌓인 고부들판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양성우, ‘만석보’)

서울로 진격하던 동학군은 11월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너울처럼 불꽃이 지고 만다. 일본군과 관군은 기관총에 초당 한 발 쏘는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동학군의 화승총은 20~30초에 한 발을 쏠 수 있었고 사정거리도 10배 차이가 났으니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 메울 수밖에 없었다. 동학당정토군은 동학군을 하나도 남김없이 남쪽 바다로 쓸어 넣겠다는 청야작전을 펼치고, 전봉준은 현상금을 노린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붙잡힌다. 한양으로 압송되는 천리길 전봉준의 그 기나긴 치욕과 고통스런 실존은 한승원의 소설 <겨울잠, 봄꿈>에 마치 어제 일처럼 그려져 있다. 동학군을 이 잡듯 토벌하고 간을 꺼내 먹을 정도로 악랄하게 복수한 쪽은 농민군에게 수모당한 유생들이 조직한 군대였다.

장도빈의 <한국말년사>는 “1884년 갑신 이후로 1894년 갑오에 이르는 10년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000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게 됐다. 삶이 위태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고 적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본주의 사상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천지개벽의 복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낙후됐던 시절 동학도가 인구의 10%를 훨씬 넘는 300만명에 이른 것은 이러한 만민평등 사상의 영향도 컸지만, 동학에 들어가면 굶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세상은 변했지만 고부 관아로 내닫는 진군북의 울림과 만석보를 허무는 해원의 삽질은 우리 귓전이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염원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구한말 외세와 탐관이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고 일컬은 냉혹한 자본주의와 시장의 침탈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가 대신하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전국에 안녕들 바람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시장사회의 범람과 무기력한 정치에 대한 무거운 경고다. 아니, 경고를 넘어 배들평야에서 관솔불을 밝히자는 사발통문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자기 스스로의 정치를 해내어가는 것, 모두의 안녕을 얻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

안녕들 바람을 일으킨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말한다. 각자의 안녕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안녕을 제 손으로 만들어가는 발걸음은 멈출 수 없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에.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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