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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가 증언하는 것 / 김종엽

등록 2013-12-17 19:02수정 2013-12-24 09:44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텔레비전은 대체로 바보상자이고, 불의한 권력을 위해 보도의 내용과 형식을 마사지하며, 심지어 군사정권 ‘삘’이 넘치는 현 정부에 <진짜 사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헌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따금씩 가능한 유토피아를 보여줄 때도 있다. 예컨대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가 그렇다.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할배들은 여전히 멋지다. 나이는 기품 있게 얼굴에 내려앉아 있다. 육신은 무겁지만 여전히 세계는 그들에게 호기심과 경이의 대상이다. 그들은 낯선 세계가 주는 불안과 불편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서로를 돕는다. 잠자리와 식사를 함께하며 타자의 낯선 버릇에 대해 다정해진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을 때, 그들은 생의 반려를 떠올리고, 메시지와 사진을 보낸다.

누나들도 나이를 넘어서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 나이를 넘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능력 때문이다. 남성들을 여러 연령대로 묶어 여행시키면 소통보다는 위계가 앞설 공산이 크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으며, 그래서 이들은 모두 누나인 것이다. 그리고 할배들과 함께 이서진이 아니라 이미연을 보냈다면 어색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나들은 실수 많은 이승기를 보듬고 위로하고 성장시킨다.

이런 프로그램을 즐겁게 보고 있노라면 할배와 누나가 꽃보다 아름다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분명해진다. 배낭여행이다. 그것이 이들을 다시 어려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은 우리를 낯설지만 경이로운 세계로 옮겨놓는데,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불안과 호기심 사이에 서성이게 된다.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아이의 상태, 더 생생한 삶의 순간이다.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헤쳐나가려면 어울림과 협동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울림과 협동의 기쁨을 다시 배운다.

어떤 형식이 필요한지는 알았다. 우리 사회 할배들과 누나들을 생생함과 기쁨의 삶으로 이끌려면 배낭여행을 보내면 된다. 젊은이 한 사람씩 따라가 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에 필요한 돈과 시간인데, 이순재나 윤여정의 해외 배낭여행이 우리 사회 성원들에게 일생의 한두번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일까? 대부분의 할배와 누나가 그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과도한 유토피아일까? 괜찮은 연금제도가 있다면 할배들이 루체른 호숫가에서 차를 마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비정규직과 노동중독적인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 휴가를 설계할 수 있는 노동법 아래서라면 누나들이 성 소피아 성당을 둘러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 1년 우리는 텔레비전에서는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와 누나를 보았지만, 그 텔레비전을 보는 할배와 누나의 현실이 얼마나 더 팍팍해졌는지 알고 있다.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는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개악이 오늘의 할배와 내일의 할배에게서 박탈한 것이 무엇인지, 비정규직과 사내하청과 특수고용과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가 이 땅의 누나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는지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두 프로그램은 현실에서는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와 누나가 아니라 선거부정을 비판하는 신부님에게 “묵과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7000여명의 코레일 노동자를 직위해제하는 ‘진격의 누나’ 그리고 청와대를 진두지휘하거나 가스통을 지고 나선 ‘진격의 할배’가 설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청년들은 이서진·이승기와 달리 서로의 안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대자보마저 찢고 있다. 이런 진격의 누나·할배·일베부터 배낭여행을 떠나 그들이 무엇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으면 좋겠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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