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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술에 취한, 권력에 취한

등록 2013-12-09 19:13

술도 많이 마시면 전설이 된다. 완적, 도연명 등이 그런 이들이다. 벼슬이 싫어 낙향해 농사지으면서 자기 주량이 닷 말이기 때문에 스스로 오두(五斗)선생이라 한 수당 교체기의 문인 왕적은 ‘취한 뒤’(醉後)란 시에서 “완적은 깨어 있을 때가 적었고/ 도연명은 취한 날이 더 많았다”(阮籍醒時少/ 陶潜醉日多)고 했다. 누가 더 고래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술의 경전>(酒經), <술의 족보>(酒譜) 등을 펴낸 왕적은 ‘취한 고을 이야기’(醉鄕記)라는 에세이에서 마침내 이들을 신선 반열에 올렸다. “완적과 도연명 등 열댓 명은 취한 고을에서 놀다가 삶이 다하도록 돌아오지 않았는데, 죽어서 그 땅에 묻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그이들을 술의 신선이라고 부른다.”(阮嗣宗、陶淵明等十數人, 幷游於醉鄕, 沒身不返, 死葬其壤, 中國以爲酒仙云.) 왕적은 취한 고을을 유토피아로 그렸다.

명말청초의 문인 대명세는 왕적의 글 제목을 빌려 또 다른 ‘취한 고을 이야기’(醉鄕記)를 남겼다. 그는 취한 고을에 들어서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 눈은 아득하고 마음이 울렁거려 기운이 하나도 없어진다”며, 완적 등이 살던 때는 폭정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이들이 취한 고을로 몰려갔다고 했다. 이후 “취한 고을에는 사람이 있으나, 천하에는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하에 깨어 있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미혹에 빠져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권력에 몽롱하게 취한 자들은 되레 멀쩡한 사람을 비웃는다고 대명세는 썼다.

정약용은 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천 명의 주정뱅이들 속에/ 선비 하나 단아하게 있으니/ 천 명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이 선비가 미쳤다고 하네.”(酗誶千夫裏/ 端然一士莊/ 千夫萬手指/ 謂此一夫狂) 술에 취했든 권력에 취했든 멀쩡한 이를 미쳤다고 하는 건 마찬가지다.

곧은 이들이 비난받거나 쫓겨났던 어지러운 한 해가 저문다. 연말이니 술자리가 많다. 폭정과 불황은 예나 지금이나 주당들을 취한 고을로 이끈다. 취한 고을로 갈 땐 가더라도, 권력에 취한 주정뱅이들 앞에서 단정함을 잃지 않았던 이들을 위해 우선 건배하고 싶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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