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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양은 에피스테메를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말한다
이 혼란은 이해되지 않은 수준의 질서인가 혼란 그 자체인가?

등록 2013-11-08 19:52수정 2013-11-15 15:58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2 - 각자
선 자리에서>, 조혜정 지음, 또하나의문화, 1994
‘지식인’과 ‘랭킹’은 평소 내가 사용하지 않는 말이므로, 이 글은 잠시 일탈이다.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종종 출판단체나 신문사에서 ‘명저 50선’, ‘주목받는 저술가’ 같은 명단을 만드는데, 재고되어야 한다. 사회 각 분야는 다양하다. 보이지 않는 분야가 너무 많다. 레즈비언이나 장애인 관련 도서는 선정되기 힘들다. 서두부터 자기 분열적 사족을 늘어놓아 민망하지만, 만일 나더러 한국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 글이 ‘오버’로 보일 것이다. 1997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내 고민은 모든 이들의 화두라고 확신하는바, 프란츠 파농이 분석한 이중 언어에 관한 것이었다. 방언과 ‘표준어’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사람처럼, 식민지 사람들은 지배자의 언어와 자기 언어를 모두 알아야 한다. 나는 여성으로서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페미니즘)를 공부하기도 바쁜데, 게다가 비(非)서구인이므로 플라톤, 헤겔, 칸트, 마르크스까지 다 섭렵하고 그 다음에 한국을 공부해야 하는가. 나는 억울했다. ‘진짜 공부’는 언제 한단 말인가.

페미니스트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각자 선 자리, 지역(로컬)은 있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글쓰기나 강의를 하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탈식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수용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라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 서구를 역사의 기원으로 상정하고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적인 후기 식민 사회에서, 서구의 권위에 주눅 드는 것은 차라리 평안한 일이다.

탈식민주의(포스트 콜로니얼리즘)는 모순된 의미가 하나로 결합된 매력적인 사유 구조다. 시간 순서상,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소위 주권 회복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식민주의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침윤되어 있는 상황 인식을 말한다. 경험은 체현이기에 청산되지 않는다. 벗어났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나를 억압했던, 하고 있는 권력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편자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면서도 그러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도전이다. 직선적 시간관, 이분법, 민주주의로 오해된 발전주의, 중산층 콤플렉스, 타자를 만드는 시간….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쟁점은 중심 되기가 아니라 주변의 가능성이다. 삶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 민중은 모욕과 굴욕 혹은 이데올로기의 ‘보호’ 아래 살아가지만, 동시에 기존의 언어를 의문시할 수 있는 위치성과 가능성이 있다.

에피스테메는 미셸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93쪽)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 민중의 혼란이 앎의 근거다. 그 이해되지 않는 질서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돌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monolithic)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담론은 부서진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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