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는 용을 잡는 기술을 익힌 사내 이야기가 나온다. 주평만이란 사람은 지리익이라는 이로부터 용을 도살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 세 해 지나 드디어 용 잡는 기술을 다 익혔다. 주평만이 귀향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얼 배워왔느냐고 물었다. 주평만은 신의 경지에 오른 자기 기술을 설명했다. 용의 뿔을 어떻게 잡고, 머리는 어떻게 짓밟으며, 어떤 칼을 써서 어떻게 멱을 따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되물었다. “기술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용을 대체 어디서 잡는단 말이오?”
이 이야기에서 온 ‘도룡지기’(屠龍之技) 혹은 도룡(屠龍)이란 말은, 겉보기엔 거창하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을 뜻한다. 이 말은 이후 허황된 학문이란 뜻과 더불어, 심오한 학문 혹은 세상을 바로잡을 역량이란 뜻으로도 쓰였다. 가령 송나라 문장가 소식은 역량이 뛰어난 이를 ‘용 잡을 사람’이란 뜻에서 ‘도룡수’(屠龍手)라 불렀다. 어떻게 허황된 학문을 조롱한 말이 심오한 학문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을까. 실용의 잣대만을 들이댈 때 어떤 학문도 도룡지기의 잉여 학문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똑같다. 가산 탕진해가며 격렬한 경쟁 속에서 학업을 쌓은 청춘들은 어느 날 문득 도룡지기만 배웠다는 좌절감에 빠진다.
한국사회의 주류라는 이들은, 고위층이든 재벌총수든, 국적위조 부정입학 병역기피 특혜취업 등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 자식 하나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다. 세상의 모든 도룡수들을 어떻게 두루 등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자리에 있는 이들이 군더더기 짓하는 사이, 절망한 젊음들은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자조하며 잉여사회 담론을 만들고 있다. 잉여 담론은 장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 자체가 자연의 ‘군더더기와 사마귀’란 뜻에서 ‘부췌현우’(附贅縣疣)라 불렀다. 벼슬 버리고 은둔한 화담 서경덕의 시에는 “요즘 산속 서재에서 잉여 독서를 한다”(近日山齋剩讀書)는 표현이 나온다. 벼슬할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으니 잉여 독서인 셈이다. 자신이 군더더기임을 아는 이들은 이미 군더더기가 아니며, 군더더기인줄도 모르고 세상을 망치는 이른바 주류들이야말로 진짜 군더더기들이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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