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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태선 칼럼] 채동욱 사건과 71년 사법파동의 교훈

등록 2013-10-07 18:41수정 2013-10-09 15:39

권태선 편집인
권태선 편집인
얼마 전 언론계 선배 몇 분과 저녁을 했다. 그 자리에서도 예외 없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 사건이 화제가 됐다. 한 선배가 이 사건과 1971년 1차 사법파동을 부른 사건과 비교했다. 정권에 밉보인 판사를 변명하기 어려운 약점을 잡아 뒤통수를 쳐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 것이 당시 파동의 원인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최고권력자의 역린을 건드린 검찰총장을 혼외자 의혹이란 올가미를 씌워 찍어냄으로써 검찰은 물론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이어 부녀 대통령 치하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일어난 게 우연일까라는 의문도 제기됐다.

1차 사법파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일어났다. 3선개헌을 통해 당내 도전세력을 제거하고 71년 4월 대선에서 승리해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박 대통령은 곧바로 종신집권 체제 구축에 나섰다. 하지만 사법부가 거치적거렸다. 당시 형사지법 판사로 파동의 중심에 섰던 홍성우 변호사가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증언했듯이, 당시 사법부엔 “청와대 경호실장의 청탁도 물리치고, 집시법 위반 학생들을 집유로 석방해줄 정도의 기개는 있었다.” 1인 지배를 위해선 이런 사법부를 길들여야만 했다.

이 무렵 한 공안검사가 이범렬 부장판사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반공법 위반 사건 증인신문차 제주도에 가면서 담당 변호사로부터 왕복 여비와 숙식비 등 향응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검사는 혐의를 잡기 위해 미행까지 붙였다. 물론 법관이 변호사의 향응을 받는 건 불법이다. 그러나 당시엔 그게 관행이었다. 더군다나 이 판사는 반공법 위반 등에 무죄 판결을 많이 내 정권의 눈 밖에 나 있었다. 판사들이 이 사건을 사법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판사들의 집단사표로 여론이 비등해지자 박 대통령은 이 판사 등에 대한 수사 중지를 지시했다. 하지만 판사들이 요구한 대법원장 면담과 사법권 독립 약속은 끝내 거부했다. 한달여를 끈 사태는 대법원장의 사표 반려로 막을 내렸다. 홍 변호사는 판사들의 궐기가 이렇게 성과 없이 끝난 게 사법부 무력화의 시발점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직원들이 법원에 상주하며 재판에 간섭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10월유신과 긴급조치로 권위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서 벌어진 채동욱 사건의 전말도 비슷하다. 채 전 총장은 취임사에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충무공의 말을 인용하며 외부 압력에 맞선 방파제 역할을 자임했다. 약속대로 그가 외풍을 막아주는 사이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팀은 피의자들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대선 결과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도 있는 이런 결정은 최고지도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이후 청와대 등의 공안 라인이 은밀하게 움직인 정황이 포착됐고, 이어 특정 언론이 그의 혼외자 의혹을 대서특필했다. 결국 그는 길목을 내놓아야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 등은 이번 사건이 권력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부인하지만, 그 말을 곧이듣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71년 사건이 사법파동으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번 사건에 대해선 제대로 된 분노조차 표출되지 못했다. 검찰 일부가 반발했지만, 박 대통령이 진실 규명 후 사표 수리라며 사안을 혼외자 진위 문제인 양 변질시키자,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채 전 총장이 보인 이해하기 힘든 행보 역시 그를 믿고 따랐던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그들의 운신의 폭을 좁혀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혼외자 문제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가 추구했던 ‘국민의 검찰’이란 꿈마저 내동댕이칠 이유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검찰, 정치적으로 중립된 국민의 검찰’이란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검찰은 다시 권력의 시녀로 불리던 오욕의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1차 사법파동은 권력에 대한 무력한 굴종이 사법부는 물론 이 땅의 국민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보여준다. 길목을 지키던 장수가 쓰러지면 다른 병사들이 나서 길목을 지켜야 한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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