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몇 시간 뒤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마주앉는다. 역사문제를 뒤로하고 북한 핵 문제와 부상하는 중국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며 거듭 압박을 가해온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함께 참여하는 형태다. 인접한 우방이 중재자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이상한 모양이지만, 1년 넘게 대화조차 단절해온 비정상 상태를 해소할 첫걸음을 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제는 미국의 요구처럼 역사문제를 제쳐둔 채 안보문제에 협력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 당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이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는 여론 때문에 연기된 것이 단적인 예다.
박근혜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지적했듯이 그동안 한·일 두 나라가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것은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 등을 통해 식민지배와 침략을 반성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역사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베 총리도 이번 회담에 앞서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승계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이어 아베의 측근인 자민당 총재 특별보좌는 고노 담화를 대신할 새로운 담화를 만들 수 있다고 나섰다. 아베의 발언이 주변국의 비판을 모면하고 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제스처일 뿐 그 본심은 “침략이라는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며 침략을 부인하고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이다.
박 대통령의 말처럼 “한 나라의 역사인식은 그 나라가 나아갈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라고 한다면, 침략의 죄과를 부인하는 아베가 그리는 일본의 미래는 패전 이전 군사강국 일본의 부활이다. 그는 13살 소녀(북한에 납치됐던 요코타 메구미) 하나 지키지 못한 것이 일본의 전후체제라며 ‘전후체제의 탈각’을 주창해 왔다. 전후체제의 근간은 군사적 공격을 금지한 평화헌법이니, 그 탈각은 헌법 개정을 통해 군사력 행사가 가능한 보통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된다. 이는 점령체제의 청산을 통한 독립 완성이란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꿈을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그렇다고 일본과의 모든 관계를 절연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실제로 아베는 박 대통령이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사이, 한·중과의 갈등을 이용해 오히려 극우적 역사인식과 집단자위권에 대한 국내의 지지를 넓힘으로써 헌법 개정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또 남쪽의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과 접촉해 메구미 부모와 북한의 외손녀의 만남을 성사시키고 이를 북-일 국장급 회담으로 발전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자국의 군사적 위상 강화에 꼭 필요한 한국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그는 역사문제에 타협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면서 박 대통령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이 됐다. 이번 회담을 미국의 압력 회피용 일회성 회담으로 끝내고 다시 대결 모드로 돌아갈지, 아니면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쪽의 진전된 대응을 조건으로 역사문제를 미봉하고 한·미·일 3각 공조 체제에 들어갈지 결정해야 한다. 또 3각 공조에 참여한다면 그 목표와 수준에도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모두 밀실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거쳐 이뤄지게 해야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다. 물론 모든 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우리의 선택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쪽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냉전시대와 같은 한·미·일 대 북·중이란 대립 구도를 강화하거나 북한 견제란 단기 목적을 위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사실상 지원하는 결과를 초래해 한반도의 안보불안을 낳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벌써 여론의 반대로 연기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한-미-일로 확대해 은근슬쩍 넘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협정이 꼭 필요하다면 위의 원칙에 비춰 국민을 설득할 일이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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