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보도와 관련해 아이의 어머니라고 스스로 밝힌 여성이 9월10일 “제 아이는 채동욱 검찰총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겨레>와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사에 보내왔다. 이 여성은 편지에서 자신의 실명을 밝혔으며, 편지 말미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지장을 찍었다.
[곽병찬 칼럼]
신약성서 누가복음의 기자는 과부와 고아에 대한 예수의 연민을 특별히 강조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포괄적인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위한 이적과 행적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구체화했다. 그만큼 이들이 짊어진 고통은 컸다. 그런 과부와 고아의 고통을 합친 것 이상의 수모를 당해야 하는 이들이 미혼모와 그 아이다.
<조선일보>가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자식’의 친모라고 지목한 여인이 엊그제 <한겨레>와 해당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의 친부 성이 채씨인 것은 맞지만 채 총장은 아니라는 내용과 함께 채 총장과의 인연을 나름 소상히 밝혔다. 그리고 ‘검사 채동욱’의 이름을 ‘도용’한 까닭을 썼다. ‘대한민국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의 어려움, 요컨대 주변의 무시와 폭력으로부터 저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학적부에 썼다는 것이다.
당사자의 해명이니 100% 믿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일보는 더 구체적인 증거로써 해명에 반박해야 했다. 그러나 그저 해명을 물고 늘어졌다. 편지 보낸 시점 혹은 정연한 문장까지 꼬투리 삼아 양쪽의 담합 가능성 따위의 의혹을 환기시키려 했다. 문제는 의혹 살 만한 행적을 남긴 공직자에게 있다는 투의 의견도 실었다. 생각건대, 중요한 것은 인권이 아니라 ‘검찰총장 혼외 아이’의 사실 여부라는 선정적 관심에 편승한 듯했다. 채 총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들의 벌떼 같은 응원도 이런 무모한 보도에 한몫했을 것 같았다.
삶과 인격에 치명적인데도 당사자 확인조차 생략했다
아이와 어머니의 인권에 대한 배려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나 보도하는 쪽이나 보도에 환호하는 이들은 ‘사실’ 그 자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이의 학적부 아버지 칸에 채동욱 석 자가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투였다. 그랬으니 관련자의 삶과 인격에 치명적인데도 당사자 확인조차 생략했다. 채 총장은 별개로 하더라도 아이와 어머니의 인권에 대한 배려란 존재할 리 없었다.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은 채 총장을 쫓아내는 데 혈안이었다는 지적은 그런 무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도 배경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보도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는 여인과 아이가 짊어지고 받아야 하는 고통과 멍에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혼외 아이의 ‘사실’ 여부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지금은 이 신문사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증좌의 하나로 이용되지만, 지난 2009년 당시 환경부 장관 혼외의 딸이 제기한 친자확인소송을 놓고 벌어졌던 논란에 대해 이 신문사 간부가 쓴 칼럼은 지금 봐도 놀랍다. 혼외 자식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조선일보’답지 않은 멋진 반문이었다. 그러나 이 칼럼엔 한 가지 빠진 게 있었다. 아비란 자가 오죽했으면 자식이 아비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을까. 제 핏줄을 거부한 자가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걸 간과했으니 그 칼럼은 정권을 위한 섣부른 변론 취급을 당했다.
이들이 세상에 무슨 죄를 짓고 무슨 피해를 끼쳤는가
모자는 한 생활인으로 평범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번 혼외 자식 논란은 이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라는 핀잔을 넘어서, 죄 없는 아이와 그 어머니는 어쩌란 말인가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다. 이제 여인과 아이는 이 땅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치명적 린치이자 낙인이다. 설사 친자로 확인된다 해도, 여인과 아이의 행복추구권은 훼손당해선 안 된다. 도대체 이들이 세상에 무슨 죄를 짓고 무슨 피해를 끼쳤으며 공직 수행과 무슨 관계인가. 시작은 축복받을 수 없다 해도, 모자는 한 생활인으로 평범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여인은 생업을 거둬야 하고, 아이는 사회적 낙인 속에서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채 총장은 잃을 게 많아 보이지만, 실은 이들에 비하면 약과다. 설사 권력의 기대대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다 해도, 더러운 공작의 희생양이라는 훈장은 이미 확보한 상태다. 여인이 편지에서 한 고백이 맞다면, 그는 세상의 여인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제 저 가련한 여인과 아이의 파괴된 꿈과 삶은 어찌할 건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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