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카를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의 연장이며, 정치적 접촉을 다른 수단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단(전쟁)은 정치적 목적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베트남전의 기획자이자 수행자인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은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렇게 후회했다. “끔찍하게 잘못된 전쟁이었다.” 그가 꼽은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북베트남의 의도에 대한 무지’였다. 그 결과 미군 5만8천여명이 희생되고 100조원 이상의 전비를 투입하고도 미국은 참담하게 패배했다.
클라우제비츠의 규정에서 ‘전쟁’이란 말을 ‘핵·미사일 도발’로 바꾸면 한반도의 현실이 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은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의 연장이다. 정치적 접촉을 핵과 미사일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의 정치적 목적은 무엇일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앞장서 이끌었던 <동아일보>는 15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번 일격(14일 북한의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은 대화를 강조해온 문 대통령을 시험해보겠다는 의도…. 대화 기조로의 변화를 꾀하는 문재인 정부를 더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같은 날 <조선일보> 사설은 이렇게 분석했다. “겉으로는 미국을 겨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노리는 심각한 위협이다.” 굳이 다른 신문의 사설을 인용한 것은, 앞선 정부를 통해 무능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른바 안보 장사꾼들의 시각을 대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의도는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한반도의 종심은 1000㎞에 불과하다. 한국을 위협하기 위해서라면 북한이 20여년 전 실전배치한 사정거리 1000~1200㎞의 노동 1호나 휴전선 북쪽에 깔려 있는 방사포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미국의 심장을 겨눌 사정거리 6000㎞ 이상의 대륙간탄도탄을 개발할 이유가 없다.
사실 북한의 안중에 한국은 없다. 휴전협정 당사자도 아니요, 종전협정을 체결할 권한도 없고, 하다못해 전시작전권도 없다. 북 정권을 위협할 게 없다. 그들에게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치명적인 위협은 미국이다. 미국은 마음대로 전쟁을 감행할 수도 있고,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도 있다. 그런 미국에 대해 북한은 노크를 해왔다. 노크로 문이 안 열리니 주먹으로 두들기고, 이제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차고 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이 그것이다. 북의 도발은 정치적 목적(체제 인정)을 위한 ‘접촉의 다른 수단’이다.
미국은 대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북한의 존재는 동아시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도전자로 발돋움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핑계다. 게다가 한물간 무기를 팔아먹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적당한 한반도 긴장’을 즐기는 사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미국을 직접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12일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댄 코츠 국가정보국장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미국이 해결해야 하는 매우 중대하고 가능성 있는 실존적 위협”이라고 말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16일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명확하게 대화 의사를 밝힌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핵·미사일 폐기’가 아니라 ‘실험의 중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맥나마라가 꼽은 잘못된 전쟁의 마지막 원인은 이렇다. “무력이 아닌 방법 즉 평화적 해결을 경시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이 북폭에 나서자 북베트남 수뇌부는 미국과 대화를 추진했다. 서로의 의도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화 제의를 걷어찼다.
“북남 합의들을 존중하고 이행해야 한다”는 15일 지재룡 주중 북한 대사의 발언은 역겹지만 “북미간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는 독설은 앞선 정부가 자초했다. 그들은 항상 반문했다. 이래도 대화냐고.
국방위원회 새누리당 간사였던 유승민 의원은 2008년 이렇게 말했다. “왜 미국만 북한과 대화하도록 방관하는가. 우리가 해야 하고 설득해야지.”
답은 이렇다. ‘그러니 대화다.’ 전쟁 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 우리의 운명을 타국이 멋대로 재단하도록 방치할 순 없다. 북과의 신뢰관계가 모두 파괴된 지금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