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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발해의 신라도와 개성공단

등록 2013-04-29 19:35수정 2013-05-14 14:28

개성공단 철수로 뒤숭숭한 오늘 같은 날은 발해와 후기 신라의 역사를 읽고 싶다.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700년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인 대아찬의 관직을 내린다. 남북국 시대의 두 왕조는 이렇게 교류를 시작한다.

발해는 독자 연호를 썼기 때문에 당과 대립각이 날카로웠다. 중국 주변의 ‘오랑캐’가 연호를 쓴다는 건, 오늘날 반미국가의 핵무기 보유만큼이나 예민한 사안이었다. 2대 무왕 때는 왕의 동생 대문예가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으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왕은 장수 장문휴를 보내 황해 건너 당의 등주(오늘날 산둥성 덩저우)를 기습 공격하도록 했다. 장문휴는 등주자사 위준을 처형한 뒤 돌아왔다. 놀란 당 현종은 733년 신라와 연합작전으로 발해에 보복 공격을 감행했지만 폭설 때문에 성과 없이 퇴각했다. 이 시기 발해와 신라는 긴장관계에 있었다.

남북 왕조가 대립만 한 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790년과 812년 ‘북국’(北國)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북국’이란 물론 발해다. 신라 천정군에서 발해 동경 책성부까지 모두 39곳의 역참이 있었고, 발해에는 신라로 가는 ‘신라도’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은 남북국의 대립을 부추겼지만, 역참과 신라도에 관한 기록은 두 왕조가 교류의 끈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기록엔 사신을 보낸 게 두 차례뿐이지만, 사신 두 번 보내려고 역참 39곳을 운영했다고 보긴 어렵다. 762년 당의 사신 한조채가 발해에 갔다가 신라도를 타고 신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길을 열어두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며, 길을 막는 정책이 가장 어리석다.

남북 사이 길을 더 열고 협력공단을 더 지어도 모자랄 판국이다. 이명박 정권 때의 금강산 관광 폐쇄에 이어 새 정권 들어서자마자 개성공단까지 위기에 빠졌다. 개성공단은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북한의 숨통을 터놓는 길이며 통일로 가는 길이다. 남북 당국자들의 숙고를 간절히 바란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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