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한유는 아들 부에게 학문을 권하기 위해 ‘성남에서 글 읽는 부에게’(符讀書城南)란 시를 썼다. 내용은 이렇다. 두 집에서 각각 아이가 태어났다. 아기일 때는 똑같이 귀여웠지만, 커가며 달라지더니, 서른에 골격이 형성되자 하나는 용이고 하나는 돼지임이 드러났다. ‘일룡일저’(一龍一猪)란 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못 보았는가, 제후와 재상이/ 농부 가운데서 나온 것을./ 못 보았는가, 재상의 후손들이/ 춥고 배고픈 채 나귀도 없이 다니는 것을.”(不見公與相/ 起身自犁鋤/ 不見三公後/ 寒饑出無驢) 한유는 배움을 통해 천한 이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고, 학업을 이루지 못하면 지배계급도 몰락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여름날 술 앞에서’(夏日對酒)란 시에서, 당시 현실을 반영해 한유보다 훨씬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 시에도 두 아이가 나온다. 가난한 집 아이가 경전과 무술을 익혀 과거를 치겠다고 하자 아비는 “우린 신분이 천해 문과든 무과든 너와 무관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이는 책을 던지고 활을 꺾은 뒤 골패 따위에 빠져 시골 노인으로 늙어간다. 부잣집 아이는 “너는 돈 많은 가문이라 벼슬 걱정 없으니 애써 공부할 필요 없다”는 손님들 말을 들은 뒤 책 집어던지고 마작 따위에 빠진다.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교육이 부모의 사회적 지위 상속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사교육비를 쏟아붓지 않으면 이른바 상위권 대학 진학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해, 대입 수험장도 아닌, 한 대기업 입사 면접시험장에 “부모님들은 여기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보아라 치맛바람, 여기까지 왔다. 우리 아이들이 ‘용 하나 돼지 하나’라도 되면 다행이겠는데, 현실은 우리에게 다산의 절망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새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관급 구호는 창의력과 상극이다. 우리 사회의 창의력을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지금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내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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