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사람들이 찬양하면서 읽지 않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지난 세기 초에 이미 이런 통찰이 나왔는데, 오늘날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80년대 청춘기에 읽던 창비와 문지의 책이 한쪽에 32줄이었는데, 요즘 베스트셀러는 한쪽에 18줄까지 줄었다. 소주 업체가 경쟁적으로 도수를 내리는 것과 닮았다. 청년시절 25도이던 소주가 지금은 19도 밑으로 내려갔다. 소주 도수 20도와 책 한쪽 20줄쯤이 저항선일 줄 알았는데, 동반 붕괴했다. 낙폭은 책이 소주보다 더 크다.
소주도 책도 가벼워져야 살아남는 시대다. ‘힐링’을 빌미로 독자에게 쓴소리 한마디 못하고, 너 지금 잘하는 거고 앞으로 무조건 잘될 거라는, 기만과 최면을 향신료로 뿌려야 팔리는 시대다. 스마트폰으로 책 읽고 뉴스 보는 속도전 시대의 독자에게 고전은 하품 유발자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더구나 거기에 중독된다니.
고전은 시간이라는, 책의 학살 공간에서 살아남은 글이다. 독자에게 아부하는 글은 자연도태조차 견디지 못한다. 고전은, 분서갱유도 없애지 못하고 문자옥과 검열관의 붉은 붓도 지우지 못한 글이다. 가령 명 태조 주원장은, “폭군을 죽인 건 저잣거리 건달 죽인 것과 같다”는 등의 쓴소리가 미워 <맹자> 총 255절 가운데 무려 85절을 잘라내어 누더기 <맹자절문>을 만들었다. 오늘날 <맹자>는 전문이 살아남았고, 주원장은 어리석은 폭군이라는 오명만 더했다.
고전은 늘 새로 해석할 여백이 있는 글이므로 옛사람의 지혜가 압축된 빅 데이터다. 칸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공격하는 이에게 하이데거는 “내 해석이 ‘좋은 칸트’는 못 되지만 ‘좋은 하이데거’는 될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런 관점에서 고전이 우리의 좋은 생각과 좋은 삶에 기여하도록 읽어보려 한다. 고전학자로서 독자들과 함께 고전에 빠져 이를 거듭 읽어갈 기회를 얻어 한량없이 기쁘다.
이상수 철학자 xuan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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