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세 가지 물음”, <톨스토이 단편선 2>, L. N.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이일선 일러스트, 인디북, 2003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의 초반, 극중 도승지가 말한다. “그는 충신이옵니다. 죽이면 아니 되옵니다.” 광해군이 말하길, “누가 그걸 모르는가, 충신 중의 충신이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는 내줘야(죽여야) 저들이 나를 믿을 것이네.” 이 대사에 충격받은 나는 이후 영화감상을 망쳤다. 나를 그 충신과 동일시하여 내 인생의 실패 원인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하지만 나의 피해망상 시나리오에 의하면, 나는 광해군 같은 약한 리더가 적에게 던진 시체였다. 약자와 강자의 판세는 번복되는 법이지만, 게임의 법칙 중에 상대 리더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라는 전법(?)이 있다.(현대사회라면 사임이나 사법처리 요구) 당사자는 잘못이 없지만 힘겨루기 차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강자는 자기 사람을 감싸는데 약자는 동지를 내쳐야 한다. 약자 진영이라도 똑똑한 리더는 강자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기 사람을 보호하여 내부 단결을 도모, 구성원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다. 영화에서는 ‘가짜 왕’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한다. (왕의 경호실장이 ‘광대’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라.) 훌륭한 리더는 내부 사람을 존중한다. 이 간단한 관계 원리를 모르는, 멍청하고 겁만 많은 부류가 의외로 많다. 자기 사람보다 강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리더는 “미래를 위해 하나 주고 하나 받는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이것은 강자의 전술이다. 이 전술을 따르면 약자는 두 배를 잃는다.(이렇게 살지 말자는 게, 탈식민주의다.) 이는 우리의 일상이다. ‘경상도’(남성, 백인, 기타 기득권층…) 리더가 경상도 사람을 중용했을 때와 ‘비 경상도’ 출신이 동향 사람을 기용했을 때, 여론은 천지 차이다. 후자의 경우 마치 ‘남침’이라도 당한 것처럼 난을 일으킨다.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성장’ ‘정치개혁’ 등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혐오, 자기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옛날 옛적 ‘밤의 왕’이 ‘낮의 왕’에게 구사한 전술이 대표적.)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답’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나 자신?” “아니면 통찰을 주는 예술가?” 나는 계속 틀렸다. 답은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우화, <세 가지 물음> 중 하나다.(163쪽) 이 장편(掌篇)은 지혜를 찾는 왕이 각계 전문가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는 이야기다. 가장 소중한 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지금 할 일은? 아무도 답하지 못했으나 왕이 체험함으로써 결국 깨우친다.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자기 자신, 가족,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해줄 사람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이라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여기 없는 이’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나는 돌아가신 엄마, 죽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 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 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의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나, 어리석기가 한량이 없다. “지금, 여기”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1904년에 썼다. 그는 지금(present) 개념이 없는 근대적 시간관의 불행을 이미 알았나 보다. 그의 단편은 그 지혜만큼이나 넘치게 출간되어 있다. 최근 국내 최대 47편을 수록한 책이 나와서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접촉하고 있는” 책부터 읽기로.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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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옮김, 이일선 일러스트, 인디북, 2003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의 초반, 극중 도승지가 말한다. “그는 충신이옵니다. 죽이면 아니 되옵니다.” 광해군이 말하길, “누가 그걸 모르는가, 충신 중의 충신이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는 내줘야(죽여야) 저들이 나를 믿을 것이네.” 이 대사에 충격받은 나는 이후 영화감상을 망쳤다. 나를 그 충신과 동일시하여 내 인생의 실패 원인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하지만 나의 피해망상 시나리오에 의하면, 나는 광해군 같은 약한 리더가 적에게 던진 시체였다. 약자와 강자의 판세는 번복되는 법이지만, 게임의 법칙 중에 상대 리더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라는 전법(?)이 있다.(현대사회라면 사임이나 사법처리 요구) 당사자는 잘못이 없지만 힘겨루기 차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강자는 자기 사람을 감싸는데 약자는 동지를 내쳐야 한다. 약자 진영이라도 똑똑한 리더는 강자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기 사람을 보호하여 내부 단결을 도모, 구성원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다. 영화에서는 ‘가짜 왕’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한다. (왕의 경호실장이 ‘광대’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라.) 훌륭한 리더는 내부 사람을 존중한다. 이 간단한 관계 원리를 모르는, 멍청하고 겁만 많은 부류가 의외로 많다. 자기 사람보다 강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리더는 “미래를 위해 하나 주고 하나 받는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이것은 강자의 전술이다. 이 전술을 따르면 약자는 두 배를 잃는다.(이렇게 살지 말자는 게, 탈식민주의다.) 이는 우리의 일상이다. ‘경상도’(남성, 백인, 기타 기득권층…) 리더가 경상도 사람을 중용했을 때와 ‘비 경상도’ 출신이 동향 사람을 기용했을 때, 여론은 천지 차이다. 후자의 경우 마치 ‘남침’이라도 당한 것처럼 난을 일으킨다.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성장’ ‘정치개혁’ 등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혐오, 자기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옛날 옛적 ‘밤의 왕’이 ‘낮의 왕’에게 구사한 전술이 대표적.)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답’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나 자신?” “아니면 통찰을 주는 예술가?” 나는 계속 틀렸다. 답은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우화, <세 가지 물음> 중 하나다.(163쪽) 이 장편(掌篇)은 지혜를 찾는 왕이 각계 전문가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는 이야기다. 가장 소중한 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지금 할 일은? 아무도 답하지 못했으나 왕이 체험함으로써 결국 깨우친다.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자기 자신, 가족,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해줄 사람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이라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여기 없는 이’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나는 돌아가신 엄마, 죽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 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 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의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나, 어리석기가 한량이 없다. “지금, 여기”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1904년에 썼다. 그는 지금(present) 개념이 없는 근대적 시간관의 불행을 이미 알았나 보다. 그의 단편은 그 지혜만큼이나 넘치게 출간되어 있다. 최근 국내 최대 47편을 수록한 책이 나와서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접촉하고 있는” 책부터 읽기로.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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