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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謂語助者 焉哉乎也>
뜻은 없으나 말을 잇는 글자가 있으니…

등록 2012-10-19 19:20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천자문>, 이민수 주해, 을유문화사, 1972
<천자문>, 주흥사 지음, 안춘근 엮음, 범우사, 1994

긴 이야기지만, 진심으로 한글 전용을 지지한다. 하지만 한자의 경제성은 여전히 유혹적이다. 상형(그림) 문자인 까닭에 한 글자만 써도 필담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조어력(造語力)도 좋다. 일본에 갔을 때 뉴스를 보다가 ‘근소인’(近所人, 근처를 지나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의 간결성에 감탄하다가, 신사(神社)의 쓰레기통 이름이 ‘호미옥’(護美屋, 아름다움을 지키는 집)인 걸 보고 이들 특유의 과잉 제작성(포이에시스)에 여행 기분이 확 달아나긴 했다.

“하늘 천 따지”밖에 모르다가 ‘수면용’으로 천자문을 집었는데, 밤을 새웠다. 내가 읽은 책 중 최고의 라스트신이 천자문일 줄이야.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천자문의 마지막 문장은 ‘위어조자 언재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 “뜻은 없지만 말을 잇는 조사(助辭)가 있는데, ‘언’(焉)은 앞 문장을 가리켜 ‘이에’ ‘여기에서’라는 뜻이다. ‘호’(乎)와 ‘재’(哉)는 탄식할 때, 의심할 때 혹은 반어(反語)적으로 사용(‘~그런가?’)한다. ‘야’(也)는 대개 끝내는 말(‘~이다.’)로 쓴다.” 한자에는 조사가 매우 많지만 대표적으로 네 자만 적은 것. 조사(助詞)가 아니라 조사(助辭)임에 유의해야 한다.

천자문을 처음 지은 사람은 중국 양나라 때 선비 주흥사(周興嗣)로 알려져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그전부터 ‘원서’가 있었고 이후에도 수없이 첨삭되었기 때문이다. 한자 문화권인 한국, 일본, 베트남에도 여러 본의 천자문이 있다. 한글 주해도 열권 넘게 출간되어 있다. 어쨌든 무제 임금이 주흥사에게 같은 글자가 겹치지 않게 글자 1000개로 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그는 하룻밤에 네자씩 250개를 만들었다. 덕분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백수문(白首文)이라고 한단다.

“뗀다”는 표현처럼(그런 어린이도 있겠지만), 대개 천자문을 ‘교육용 기본 한자’로 알고 있다. 막상 펼치면 괵(虢, 괵나라, 제후국 이름), 계상(稽顙, 엎드려 땅에 이마를 댔다가 천천히 다시 드는 것), 사연(肆筵, 잔치를 베품)…이런 문자가 즐비하다. 실용보다는 고대 중국 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적합한 책이다. 교육용을 위해서라면 당대 우리만의 천자문이 필요하다.

250개 시구의 내용은 인간의 도리, 공부의 필요성, 자연과 우주의 섭리, 관리의 덕목 등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상, 공부하는 남자들의 수준이 반영된 글귀들이 있다. 예를 들면, ‘모시숙자 공빈연소.’(毛施淑姿 工嚬姸笑, 모장과 서시 같은 미인은 찡그려도 예쁘기만 하다.) 더한 문장도 수두룩하나, 문자가 아까워 생략한다. 개인적으로는, ‘유배당한 처지가 속 편하다’는 ‘색거한처 침묵적요’(索居閑處 沈默寂廖, 한가한 곳을 찾아 사니 조용하다)가 제일 좋았다.

‘위어조자 언재호야.’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art)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장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을 가진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 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deployment), 지배한다. 의미(권력) 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우리말은 띄어쓰기가 의미를 결정하기도 한다. 마침표와 물음표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안녕?”인지 “안녕~”인지 늘 궁금했다. 읽은 후에도 구분하지 못했다. 문장의 의미와 수준은 동사, 명사, 형용사가 아니라 돕는 자(者)가 좌우한다. 글이든 삶이든 ‘진정한’ 힘이 존재하는 원리는 비슷한 법.

실은, 좋은 글귀 말고 갖고(?) 싶은 문장이 있었다. ‘탐독완시 우목낭상.’(耽讀翫市 寓目囊箱) “돈 없이 서점에 가도, 한번 읽으면 머릿속에 책 내용이 다 들어온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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