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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등록 2012-02-24 21:40수정 2012-04-18 10:50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프로이트Ⅰ,Ⅱ〉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교양인, 2011, 1권 206쪽

원래 지난번 글 제목은 “그 문장의 공간-연재를 시작하며”였다. 담당기자가 “내 수첩을 공유합니다”로 바꾸었다. 불만은 없지만 이 제목은 마치 내가 ‘보물수첩’을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 당황했다. 나도 본문에 “공유”라고 썼지만 ‘펼쳐 보이는’ 식은 아니다. 앎의 방식에는 엿보기, 모방, 시도, 실마리, ‘오독’, 암기 등이 있다. 공부의 목적과 대상에 따라 효과적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엿보기(관음증)는 약자의 사랑 방식이다. 따라서 “수첩을 공유하겠다”는 독자를 다소 수동적으로 상정하는 방식이 아닐까?

물론, 유사 이래 가장 논쟁적인, 치열한, 지독한 사상가 프로이트라면 더 ‘압도적인’ 제목을 썼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논쟁적’의 의미는 이론의 자기 내파(內波)를 통한 끝없는 파생과 창조성이다. 사상으로서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매력은 한계, 문제, 역설, 비일관성, 심지어 혼란(그 유명한 <여성성> 논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 읽기의 핵심은 ‘수염 난 백인 할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은 재해석이다. 나는 그가 불멸의 이론가라기보다 19세기 유럽 중산층 사회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라고 본다. 카렌 호나이의 지적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 발달의 절대적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개화할 무렵 당대 남성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페미니즘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려운,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는 점이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인간에 대한 환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해부는 말 그대로 육체에 대한 것이지만, 그는 그전 인류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정신, 사회, 섹슈얼리티, 언어를 해부학과 연결시켰다. 말이 몸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1400쪽(한글판)이 넘는 사유의 밀림에서 하나의 문장을 고르는 것은 고통이지만, 나는 제2장 “무의식의 탐사” 중에서 프로이트가 친구 플리스에게 쓴 편지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이 말의 문맥은 프로이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느낀 죄책감(“그는 아버지보다 뛰어났는데 그건 왠지 금지된 일 같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연구로 발전시키면서 나온 말이다.

사상가는 그 자신이 사유의 도구이며 개인의 감정은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대개는 약점이라지만, 나는 “자서전과 과학의 뒤엉킴”(193쪽)이 정신분석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은 결국은 한 개인의 이야기다. 백인 중산층 남성의 경험이 보편적 이론으로 여겨진 것은 권력의 작동 때문이다. 그들의 이론이 역사가 아니라 그들의 이론이 역사가 된 과정이 역사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문장은 지식의 근본 문제, 즉 인식자와 인식 대상의 관계를 가장 바람직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再’現)된 것이다.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하며 고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언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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