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이곳은 내 수첩을 공유하는 쑥스러운 자리다. 책을 읽다가 책갈피나 포스트잇을 사용하거나 페이지를 접어놓는 경우가 있다. 나는 메모하면서 읽기 때문에 연필을 끼워둔다. 나는 책을 많이 읽거나 책읽기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수다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목숨을 부지하려고’ 읽는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두 가지다.
생계 문제와 병치레로 최근 몇년간 여섯 차례 이상 이사를 했다. ‘간이 이사’를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때마다 청소에 진력이 났다. 이제는 청소가 겁나 이사를 하느니 어디든 받아주는 ‘시설’로 들어가 생을 마칠 생각이다. 엄마에게 “인생은 청소인가 봐” 하소연했더니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걸 인제 알았냐.” 청소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나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노동 목록을 만들어 보았다. 취업, 요리, 사랑, 공부, 육아, 이별, 글쓰기… 그리고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 태진아의 가사를 대입시켰다. “돈은 아무나 버나”, “애는 아무나 키우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 만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 쭉 적다 보니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은 아무나 읽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 그나마 이 말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누구는 아니었겠냐마는 나는 한때 문학소녀였다. “입시가 먼저”라고 다짐하면서 책읽기를 참다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811.37(한국 소설 분류) 계열을 읽어대기 시작했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이문열의 <금시조>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문학의 꿈을 접었다. 19세 소녀의 눈에 그의 문장이 어찌나 위대해 보였는지, “나는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도 기가 죽어서 포기에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몇해 전 이문열이 어느 매체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내게도) 글쓰기는 고통이다. 글을 쓸 때 가장 덜 외롭기 때문에 쓴다.” 아, 이문열도 외롭구나.
사람마다 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추운 겨울날 아침 따뜻한 잠자리에서 나오려면 상당한 수준의 삶의 동기가 필요하다. 근데 나는 여전히 방황중이다. 이와 더불어 내 인생고 중 하나는 외로움인데(생활고를 제쳐둔다면), 외로움은 내가 나랑 만날 때, 나랑 놀 때, 내게 몰두할 때 다소 견딜 만해진다. 그것이 내겐 책읽기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요약하면, 삶이 힘든데 책읽기는 그중 ‘쉬운’ 일, 덜 외로운 일이어서다. 책과 삶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책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기 때문에 고단한 삶을 우회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어딜 가나 펜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어두운 극장에서도 대사를 적어가며 영화를 본다. 감동적인 노래 가사, 거리의 간판, 지하철역, 식당 액자의 언어도 적어둔다. 하지만 이 지면의 텍스트는 출판된 책으로 국한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밑줄을 긋게 되는 구절이 있다. “나는 더 이상 맑스주의자 아니다, 맑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푸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클라우제비츠”, “배의 맛을 알고자 한다면 배를 변화시켜야 한다. 즉, 입속에 넣고 씹어야 한다, 마오쩌둥”,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파농”, “어이, 거기!, 알튀세르”, “차이의 기호가 될 때 여자는 끔찍해진다, 브라이도티”,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경험이다, 나혜석”,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최명희”, “좌절은 소비를 부른다, <토지>”, “모든 곡식은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지요, <태백산맥>”….
역사를 바꾼 말도 있고 나를 상담해준 글귀도 있다. 이들은 시대와 학문을 함축한다. 이 지면에서 내 꿈은 한 문장에 대해 저자가 말하고자 한 의미, 역사적 맥락, 지식 전반에 미친 영향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이를 글로벌 자본주의와 후기 국민국가가 좌충우돌하는 이 시대 ‘동아시아 여성(나)’의 시각에서 재해석해보는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나 자신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설레고 긴장된다.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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