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
성한용칼럼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국민들로부터 받았던 사랑, 그 정성, 거기서 받은 제 명예를 다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19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기자들과 지지자 수백명이 북적댔지만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연단에는 ‘평화, 선진, 통합, 오늘 시작입니다!’라는 펼침막과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중도가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손학규 전 지사는 “그것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신당 창당을 하면 누가 동참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탈당과 신당 창당 결심은 독자적으로 했다”고 대답했다.
결국, 탈당이 정치적으로 죽음의 길이라는 것, 중도를 기치로 집권하기 어렵다는 것, 신당 창당 시나리오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결단’만 있지, ‘준비’는 없다고 솔직히 밝힌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선진 개혁세력 통합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공허하다. 그의 탈당에는 명분이 너무 없다. 오죽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정치인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을까. 그의 탈당을 “정계개편의 새로운 국면”이라거나 “용기있는 결단”이라고 부추긴 여권은 ‘얌체’들이다. ‘손님 실수’를 틈타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인데, 속이 너무 보인다.
현실 정치의 논리는 냉혹하다. 명분이 없으면 죽는다. 세 싸움에서 밀리면 죽는다. 정치인 손학규는 죽었다. 기자회견은 장례식이었다.
손학규는 왜 죽어야 했을까? 두 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좌파 정권 비난의 후폭풍을 맞았다. 한나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줄곧 ‘좌파’로 몰았다. 누군가를 왼쪽으로 밀면, 미는 사람은 자연히 오른쪽으로 밀린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다. 한나라당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경화했다. 그의 표현대로 ‘군정 잔당들과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들’이 당을 접수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 정체성을 가진 그는 설 땅이 없어졌다. 그런 그가 노무현 정부를 ‘무능한 좌파’라고 여전히 비난하고 있다. 아이러니다. 둘째, 세태에 졌다. 손학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한 민주계의 총아였다. 그러나 와이에스는 그를 외면했다. 이명박 전 시장을 지지했다. 믿었던 소장파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는 간단한 원리였다. 줄은 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는 것이기도 하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풍토’를 그는 수구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그런가? 아니다. 세상 인심이 본래 그렇다. 몰랐다면 바보다. 억울해할 필요 없다. 그의 잘못도 크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복잡하다.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간결함을 갖추지 못했다. 정치인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지지율이 낮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때를 잘못 만난 불운한 정치인일 수 있다. ‘무지몽매’한 유권자들이 그의 진가를 몰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 유권자의 수준을 탓할 수는 없다. 때가 맞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국민들로서는 다음 대통령이 꼭 손학규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는 20일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불쏘시개도 될 수 있고, 치어리더도 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옳은 자세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게 손학규가 사는 길일 수도 있다. 정치는 역설이다. 성한용 선임기자shy99@hani.co.kr
첫째, 좌파 정권 비난의 후폭풍을 맞았다. 한나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줄곧 ‘좌파’로 몰았다. 누군가를 왼쪽으로 밀면, 미는 사람은 자연히 오른쪽으로 밀린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다. 한나라당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경화했다. 그의 표현대로 ‘군정 잔당들과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들’이 당을 접수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 정체성을 가진 그는 설 땅이 없어졌다. 그런 그가 노무현 정부를 ‘무능한 좌파’라고 여전히 비난하고 있다. 아이러니다. 둘째, 세태에 졌다. 손학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한 민주계의 총아였다. 그러나 와이에스는 그를 외면했다. 이명박 전 시장을 지지했다. 믿었던 소장파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는 간단한 원리였다. 줄은 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는 것이기도 하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풍토’를 그는 수구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그런가? 아니다. 세상 인심이 본래 그렇다. 몰랐다면 바보다. 억울해할 필요 없다. 그의 잘못도 크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복잡하다.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간결함을 갖추지 못했다. 정치인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지지율이 낮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때를 잘못 만난 불운한 정치인일 수 있다. ‘무지몽매’한 유권자들이 그의 진가를 몰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 유권자의 수준을 탓할 수는 없다. 때가 맞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국민들로서는 다음 대통령이 꼭 손학규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는 20일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불쏘시개도 될 수 있고, 치어리더도 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옳은 자세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게 손학규가 사는 길일 수도 있다. 정치는 역설이다. 성한용 선임기자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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