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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어느 정치인의 전화

등록 2024-01-11 15:23

11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 마련된 제22대 총선 대비 공명선거지원상황실에 ‘선거일 전 90일’이 켜져 있다. 연합뉴스

 

이우연|정치팀 기자

2022년 9월 어느 날, 밤 10시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우연 기자시죠?”

제보 전화가 종종 오는 터라 그런 줄 알았다. 휴대전화 너머 그는 자신을 국회의원이라 소개했다. 태풍 힌남노가 오던 날, 서울 관악구 노부부의 집에서 함께 머무른 체험을 쓴 르포기사를 봤다고 했다. 그 노부부는 한달 전 폭우로 침수 피해를 봐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들 맞은편 빌라에 사는 발달장애인 일가족은 집을 빠져나오지 못해 결국 숨졌다.

국회의원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노부부를 직접 찾아가 무엇이 필요한지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 때문에 연결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허락을 받고 해당 노부부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사실 좀 놀랐다. 정치 기사도 아닌, 사회면 기사를 읽고 어려움을 겪는 이를 찾아 이야기를 듣겠다는 국회의원이라니. 그는 며칠 뒤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에게 반지하 주민들 주거 대책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날카로운 질의를 던졌다.

최근 그 초선 국회의원은 올해 4월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탄희 의원이다. 다양한 정당의 국회 진출을 보장하는 현행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보장해달라고 주장해온 이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의 목적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증오 정치는 정치의 목적, 싸움의 목적을 잃었습니다. 용접공 유최안, 800원 버스기사 김학의, 신림동 반지하의 홍수지, 에스피씨(SPC) 빵을 만들던 박선빈, 쿠팡 물류센터의 장덕준, 서울대 청소노동자 이홍구 등 제가 의정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은 정치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또 다른 정치인이 있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고충접수센터 종합센터장이다. 주거권 시민단체인 민달팽이유니온 대표 출신이자 원외 청년정치인인 그는 전세사기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던 지난 12월27일까지 59일 동안 국회 정문 앞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진행했다. 그의 활동을 지켜봐온 한 민주당 당직자는 “의원들이 전세사기특별법 논의에 신경을 못 쓰고 있을 동안 전국에서 열리는 피해자 간담회를 찾아다니고 의원들을 만나며 특별법 개정을 설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새해 벽두 제1야당 대표가 흉기에 피습당했다. 여야 정치인들 모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증오 정치’를 끝내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구체적인 자성 없는 구호에만 그친다는 인상이 든다. 정치가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지 냉소부터 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만 2년이 되도록 야당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도 만들지 않고 있다. 매주 세번씩 열리는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보면, 여전히 야당 정치인들이 할 말은 ‘반윤’밖에 없나 싶다.

그래도 앞서 얘기했듯이 시민들의 삶을 더 필사적으로 살펴보려는 정치인들이 없지는 않기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손쉬운 증오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정치인들만 있는 건 아니라고, 적어도 새해를 시작하는 이 글에서는 남기고 싶다.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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