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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시시한 정치에서 벗어날 통 큰 야심

등록 2023-11-15 07:00수정 2023-11-15 08:36

변방에서 시작된 변화는 패러다임을 바꾼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변방의 선두에 서 있다. 강대국의 힘이 격돌하며 변화무쌍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의외의 공간을 열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 변화와 혁신에 적극적인 사회적 역동성, 독재와 부패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시민적 항거 전통,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 문화적 소프트파워…. 뒤져보면 우리가 가진 것은 의외로 많다.
국회의사당.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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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올해 단풍은 시시하다. 은행도 노랗지 않고 단풍도 빨갛지 않고 하늘도 파랗지 않다. 코로나에, 럼피스킨병에, 때아닌 빈대 소동까지, 감염병과 기후 재난은 이제 이변이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병든 지구 위에서 전쟁과 살육도 일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어린이와 환자들까지 무더기로 죽어 나간다. 대규모 학살을 제재하고 양측을 중재할 국제기구는 무력하고, 강대국은 제각기 이해관계에 휘둘려 갈팡질팡하고 있다.

전쟁과 참사의 고통은 검은 안개처럼 밀려와 숨통을 조이는데, 한국 정치는 근시안적 무사안일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총선을 앞두고 지리멸렬한 지지율을 만회하겠다고 국민의힘은 공매도 금지를 시행하고 김포시 서울 편입, 부자감세를 추진 중이다. 효과가 미미하거나 극소수 이해관계자만 돈방석에 앉히는 정책들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승기를 잡았다는 자만에 빠져 계파 키우기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가만히 앉아 광이나 팔겠다는 심산인가.

신당 세력은 도처에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밀지만, 대체 무얼 위한 창당인지 모호하다. ‘양당체제 종식’은 성공의 결과이지 목표라고 할 수 없다. 계파 재정비와 자기 몸값 올리기, 개인의 명예회복이 창당의 진짜 목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치는 실종된 채 총선용 합종연횡을 위한 눈치 싸움이 거듭된다. 그러다 총선 끝나면 또 이합집산하겠지. 늘 봐왔던 모습, 아! 지루하다.

혼돈과 전환의 시대,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이라면 우리 시대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장기적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다시는 한반도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방법, 기후위기로 인한 상시적 재난과 질병을 최소화할 방법, 압축성장이 야기한 고독과 강박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부심과 포부로 활기차게 살게 할 방법.

문제는 알지만 해법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으면 방법은 나온다. 완전히 새로운 설계, 완전히 새로운 공법으로 새길을 낼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냐?”고 반문하는 이들에게 젊은 연구자 황순식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세계 평화와 긴장 완화 무드를 선도할 수 있는 나라는 미·일·중·러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적으로 국외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국내 여론을 통합시킬 수 있고, 긴장완화는 비겁함이나 나약함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정부와 정치인들은 긴장완화에 대한 부담이 크다. (…)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국이 통합되고 강해지는 것을 위협으로 느껴왔다. (…) 긴장완화와 평화가 국가의 이익과 일치하는 유일한 나라이기에, 한국은 이를 주도하는 센터 국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세계인의 동의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다.”(황순식 ‘한반도 지정학과 평화의 기획’, 정태인 추모포럼, 2023년 10월20일)

지난해 타계한 정태인은 이런 발상의 선구자 격이다. 그는 현재의 미-중 갈등이 양국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냉전시대의 미-소 갈등만큼 비타협적일 순 없다고 보고, 한국이 ‘끼인 국가’들과 연대해 ‘제3지대’를 선도하고 평화를 위한 국제규범 수립에 앞장선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봤다.

생명평화운동가인 정성헌은 한발 더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생명사회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비무장지대를 국제적인 평화생명특구로 지정해 평화산업단지를 조성하자고 제안한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지난달 ‘아테네 민주주의포럼’에서 뉴질랜드가 자연 하천에 인간과 같은 법인격을 부여한 사례를 들어, 비인간 자연과 생명체의 권리를 대변하는 대리인으로 구성된 ‘제4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들 모두 한국이 ‘성장과 확장과 경쟁의 문명’에서 ‘생명과 평화와 공생의 문명’으로의 전환을 선도하자는 주장이다.

변방에서 시작된 변화는 패러다임을 바꾼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변방의 선두에 서 있다. 강대국의 힘이 격돌하며 변화무쌍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의외의 공간을 열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 변화와 혁신에 적극적인 사회적 역동성, 독재와 부패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시민적 항거 전통,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 문화적 소프트파워…. 뒤져보면 우리가 가진 것은 의외로 많다.

우리는 더는 약소국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 어느 편에 설 건가로 소모적 논쟁을 할 게 아니라 세계사의 당당한 주체로 담대한 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자리에 연연하는 시시한 탐욕 대신 평화체제 생명사회를 선도할 배포 큰 야심이다.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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