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요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말 한마디로 국가의 큰 결정이 내려지고 정부, 여당, 언론이 ‘어명’을 받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이 도로 대한제국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듯이 사람들의 관심과 비판적 담론들 역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대통령 측근들에게 집중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대통령제의 폐해, 특히 윤 대통령의 일방적인 불통 정치의 문제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전능한 왕인가? 아니면 지배계급의 거대한 카르텔이 한국 사회를 한층 더 깊이 장악하는 반동의 역사에서 왕의 배역을 맡은 꼭두각시인가? 우리는 윤석열 시대에 정치의 무대 뒤에서 어떤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윤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그 어떤 대통령보다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부 정책이 대통령 맘대로 좌우되는 자의적 지배가 만연해 있다. 그런데 유념할 점은 그처럼 엄청난 힘을 휘두르는 대통령이 일관된 철학과 시대진단, 국가비전을 결여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신자유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무슨 ‘주의자’로 부를 만한 정신적 깊이가 없다.
대통령의 사고는 한국 사회 특권층의 우월의식, 극우들의 세계관, 검사 정체성, 시장만능주의의 어휘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것 같다. 대통령이 그것을 즉흥적으로 내뱉으면 여당과 대통령실, 정부 부처와 검찰·감사원 등 권력 수단이 된 국가기관들이 집행한다. 이런 식이다 보니 대통령의 힘은 사회를 체계적으로 바꾼다기보다, 술 취한 듯 비틀거리게 한다. 무능한 왕의 폭정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윤 정부에서 어떤 일관된 노선을 찾기 어렵다. 복지서비스 시장화, 실업급여 축소 주장 등 ‘신자유주의적’ 측면이 있고, 그렇게 규정하는 데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조 압수수색으로 임금격차 해소하고, 강사 세무조사로 사교육 없애고, 시민단체 보조금 끊어서 기후재난 해결하고, 반국가세력 척결해서 안보 지킨다는 식의 정치 행태는 전통적인 보수정치와 결이 다르다.
이처럼 이념도 정책도 없이, 오직 권력을 위해 대중의 불안과 증오를 요리하는 기술이 발달하는 것은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종국에는 권위주의 체제로 간다는 사실이다. 이미 공론장의 논쟁, 당사자들의 참여, 협상과 타협이라는 정치 과정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국가가 일방적으로 국민의 삶을 결정하는 구조가 들어섰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이 진정 무서운 것이다.
나아가 권위주의 정치는 약탈적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환경이 된다. 한국 사회 특권집단은 무능한 대통령의 과도한 힘을 우려하면서도 자신들의 계급이익을 위해 이용한다. 노동자와 시민의 기본권과 주체성을 이토록 철저히 억압해주는 정권을 왜 마다하겠는가. 권력과 특권의 이 같은 공생은 한국 자본주의를 고도화하는 대신, 야만화한다. 힘없고 돈 없는 국민에 대한 숨김없는 경멸 위에 그들의 궁전이 세워진다. 한국의 계급지배가 이만큼 적나라하고 파렴치했던 적이 있던가.
한국 사회의 야만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극우의 주류화, 주류의 극우화라는 이중적 과정이 계속된다면 한국 사회 지배양식은 더욱 폭력적으로 될지 모른다. 극우 인사들이 대거 공공기관장에 임명되어 국가조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과정의 결과가 무엇일지 진실로 우려스럽다. 향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조금이라도 커지면, 사회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극우의 참호들에서 개혁세력을 타도하려는 강력한 힘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왕놀이가 허락된 무대의 커튼 뒤에선 국가,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 냉정히 현실을 진단한다면 지금 야당에도, 시민사회에도, 사회 어디에도 이 거센 퇴행의 물줄기를 거슬러 역사를 앞으로 밀고 갈 주체와 역량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 뒤에 겪은 좌절과 배신이 너무 두텁게 쌓였기 때문일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찍이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에리히 프롬이 통찰했듯이, 사회의 무기력과 순응주의는 권위주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영속시키는 사회적 토양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세상이 오지 않으려면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한다. 사회의 생기가 되살아나는 장소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공동체와 연대의 끈을 지키는 모든 곳이 곧 다른 미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