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재의요구권 행사에 반발하며 19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린 ‘간호법 거부권 범국민 규탄대회’에 참석한 간호사들과 간호대학 학생 등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황보연 I 논설위원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이저벨 윌커슨은 그의 저서 <카스트>에서 인류의 역사상 카스트 체제를 크게 세가지로 지목한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어 비극으로 치닫다 진압된 나치 독일의 카스트, 공식적으론 폐지됐지만 좀처럼 사라질 기색 없는 인도의 카스트, 드러나거나 언급되지 않지만 인종을 기반으로 이어져온 미국의 카스트가 그것이다. 카스트는 사람의 가치를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구분한다. 누가 무엇을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지가 처음부터 정해진다. 지배 카스트는 하위 계급에게 지시하고 단속하고 징벌한다. 그들은 자신보다 아랫단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넘보거나 분수 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한다.
최근 간호법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의료계 카스트’라는 용어가 적잖이 등장했다. 맨 윗단의 의사를 중심으로 수직적 위계질서가 공고히 구축돼 있는 의료계의 현실이 카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탓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로 다시 국회로 온 간호법은
30일 재의결 불발로 끝내 좌초됐다. 간호법 1조는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 조항의 ‘지역사회’ 문구가 간호사의 단독 개원 길을 열어줄 것이라며 반대했다. 의료법이나 간호법의 다른 조항을 보더라도 단독 개원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도, 의사단체의 반발은 유독 거셌다. 어차피 지역사회의 방문진료에 큰 관심을 보여온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의사들은 모든 의료행위를 독점하려는 속성을 보이는데, 이는 의사 면허를 통해 작동되는 지대 추구와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는 의료기관의 90%가 민간 소유라서 의료인의 수익 추구가 당연시된다. 여기에 의사의 진료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별 수가제도’가 근간을 이룬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누가 그 행위를 해서 수익을 올릴 것이냐가 민감한 문제가 된다. 간호사가 개원할 우려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의사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짚는다. 병원을 차리는 것부터 국민건강보험에서 돈을 받는 일까지, 모든 것이 의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간호법이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란 해석이다.
실제로 의료법에 명시된 의료인의 업무범위 관련 조항은 1962년 개정된 이후 거의 변화가 없다. 의사의 임무는 ‘의료와 보건지도’가 전부이고, 간호사도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로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의사의 지도하에’ 간호사의 업무는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그때그때 정해진다. 한 광역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조아무개씨는 “채혈은 임상병리사의 몫이고 엑스레이 촬영은 방선사의 업무이지만, 병원 쪽은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고 간호사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의사들이 바쁘면, 간호사가 의사의 아이디를 넣어 대리처방을 하고 환자 경과 기록을 쓰기도 한다.
의사단체는 지난해 간호법의 상임위 논의에서도 ‘진료의 보조’라는 문구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원안에는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명시돼 있었다. 앞부분에 ‘의사의 지도하에’라는 문구와 의미가 중복되는 데도, ‘보조’라는 문구를 뺄 경우 간호사들이 독자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올해 1월에야 지방자치단체 소속 간호사들이 방문간호 때 혈압·혈당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정부 유권해석이 바뀐 것은 이들의 종속적 지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간호 업무의 전문성에 대한 요구는 나날이 높아지지만, 간호사들은 ‘전문직이라는 자부심 결여’가 심각한 수준(2020년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이라고 호소한다. 간호사 1명당 16.3명의 환자(상급종합병원)를 돌볼 만큼 업무량이 과다한데다 직무 만족도가 낮다 보니 5년 내 퇴사율이 50%에 육박한다. 2020년 기준 의사와 간호사의 연간 평균 임금은 각각 2억3070만원과 4745만원으로 5배 차이가 벌어진다. 직무에 따른 임금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직전 10년간 의사 임금의 연평균 증가율은 5.2%, 간호사는 3.8%에 그친다.
의료계 카스트가 초래하는 문제는 결국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대학병원 근무 경험이 있는 박한슬 약사는 “서구에서는 환자 중심 의료 개념이 도입되어 팀진료를 매우 중요시한다. 약사들이 약 처방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간호사들이 환자의 연령·상태에 따라 최적의 간호를 제안하는 식”이라고 말한다. 국내에선 대등하고 협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의사에게 종속된 형태로 모든 업무가 이루어져, 각 직역 간 전문성이 발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면 공론화가 필요해 보인다. 의사단체의 실력행사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정부와 정치권은 의사단체의 눈치 보기에만 급급해왔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 자체가 실종된 상태다. 미국 예일대에서 보건학을 가르쳤던 윌리엄 키식 교수는 <의료의 딜레마>에서 접근성과 비용, 품질이라는 서로 상충하며 경쟁하는 세가지 의료의 가치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다른 가치를 잃을 수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치는 ‘의료의 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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