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 | 작가
“퇴원하면 생각해봐야지.”
아버지는 꼭 이 말로 통화를 끝맺는다.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도,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가고 싶은 곳을 물어도 늘 퇴원하면 생각하겠다고 말한다. 당장의 욕구를 유예하며 퇴원하는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듯했다. 벌써 요양병원 생활 5년째다. 입원할 때 50대 후반이었던 아버지 나이는 이제 60대 초반을 넘어서고 있다.
5년 전, 아버지에게 치매가 시작되고 화상까지 입으면서 더는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요양병원이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싫어했지만, 내가 입원을 결정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꼬박 요양병원에서 살았다.
그사이 감염 위험으로 오랫동안 대면 면회가 금지됐고, 같은 병실에 감염병이 돌면 공용전화도 못쓰게 해서 통화도 못할 때가 많았다. 최근 대면 면회가 허용됐지만 그마저도 좁은 간호사실 한편에서 겨우 할 수 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 틈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와 대화하려니 여간 멋쩍은 게 아니었다. 아버지와 그 어떤 교류도 쉽지 않았던 팬데믹 기간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생활이 절망적이었다는 건 아니다. 같은 병실 동료들이 생기며 웃고 떠들고 싸우고 화해하며 지냈다. 이전에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만 보는 것보다 활발한 일상이었고, 병원에 들어가고 나서 활력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몇달 전에는 심장이 안 좋아져서 종합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때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병실 동료들, 간호사, 간병인의 모습을 보았다. 요양병원에서 격리되고 고립되었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그때야 아버지가 여러 사회적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요양병원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다.
최근 대면했을 때는 아버지의 미간이 활짝 펴져 있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이발한 상태였다. 요양병원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빡빡 깎은 머리가 아니었다. 양옆은 바짝, 윗부분은 조금 길게 남겨둔 스타일이었다. 새로 온 간호조무사가 미용사 출신이어서 말하는 대로 깎아준단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쏙 알아채는 단골 미용실이라도 생긴 것처럼 말했다. 아버지에게 머리스타일이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는 방편이지 싶었다.
아버지의 밝은 모습은 나에게 안도감과 함께 면죄부를 줬다. 당신 뜻에 반대된 입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좋아지지 않았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병원 밖에 서로의 존재 자체를 환대하는 관계가 있다면 어떨지, 머리를 마음에 쏙 들게 손질해주는 단골 미용실이 있다면 어떨지 고민하게 된다. 올해는 미루고 미뤄왔던 이 고민을 실행해보려고 한다. 바로 아버지의 요양병원 퇴원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병원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계획해보는 게 새해 다짐이다. 날이 따뜻해지는 때가 실행의 기점이 될 듯하다.
나 스스로도 생계와 돌봄을 병행할 수 있을지 도전이다. 아버지의 주치의는 혼자서 돌보기 힘들다는 것을 지속해서 상기시켜준다. 돌봄서비스 환경도 좋다고 할 수 없다. 지난 정부에서 다져놓았던 치매국가책임제, 커뮤니티 케어, 사회서비스원도 이번 정부 들어 예산이 삭감됐거나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5년 전과 달라진 점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하려고 하지 않겠다는 나의 마음가짐이다. 힘들고 불안할 때 기꺼이 도움을 청할 것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당신에게 신호를 보낼 것이다. 돌이켜보면 돌봄서비스의 공백만큼이나 서로 도움을 나눌 관계의 공백도 큰 문제로 다가온다. 어쩌면 아버지도, 나도, 당신도 함께 회복해야 할 것은 기꺼이 도움받을 마음과 기꺼이 품을 내어줄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