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왼쪽)과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AP연합뉴스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영국 역사상 ‘최단임 총리’로 기록된 리즈 트러스는 지난 9월 취임 당시만 해도 ‘제2의 마거릿 대처’를 꿈꿨다고 한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 전 총리는 감세, 규제 완화,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의 정책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기업에 최대의 자유를 주면 경제가 빨리 성장해 모두가 잘살게 된다고 주장했다. 트러스 전 총리는 대처의 처방을 좇아 대규모 감세를 핵심으로 하는 ‘미니 예산안’을 발표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물가 상승 등으로 서민의 삶이 피폐하고 불평등은 더 심해지는데, ‘부자 세금 깎아주기’는 너무 눈치가 없는 정책이었다. 결국 정부 빚이 늘 것으로 본 금융시장의 동요로 그는 재임 49일 만에 물러났다.
후임 리시 수낵 총리는 세금을 더 걷어 민생 지원을 확대하는 쪽으로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처와 손발 맞춰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던 미국도 지금은 완전 딴판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기업이 조세 회피처를 이용해 법인세를 떼먹지 못하도록 최저세율을 법제화하는 등 대규모 부자 증세와 서민을 위한 복지 확충에 나섰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에너지 기업에 ‘횡재세’를 부과하는 등 증세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하지만 트러스는 외롭지 않다. 방탄소년단(BTS)과 <오징어 게임>의 나라 한국에서, 세계적 흐름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동조하는 정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연간 3000억원 이상 이익을 낸 초거대기업의 법인세를 깎아주고, 주식·채권으로 한 해 5000만원 이상 번 개인의 금융투자소득세를 유예하는 등 ‘부자 감세안’을 줄줄이 내놓았다. 여기에는 주택과 땅을 많이 가진 이들의 종합부동산세를 줄여주고, 기업을 물려받을 때 상속세를 덜 내도록 하는 안도 포함됐다. 이렇게 세금을 줄이면 정부가 쓸 수 있는 돈도 줄어드니, 빚을 내지 않으려면 재정 지출을 조여야 한다. 정부는 공공임대주택과 지역거점병원, 노인 일자리, 청년 지원, 초등 돌봄교실 등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복지예산을 깎겠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심각한 빈부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감세 명분도 트러스와 판박이다. 대기업과 부유층의 세금을 줄여주면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일자리도 많아지니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것이다. 물이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에서 ‘낙수효과’로 알려진 주장이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같은 논리로 수십조원 규모의 감세를 단행했지만, 기업들은 내부 유보금을 더 쌓았을 뿐 투자를 늘리지 않았다. 대기업이 투자를 안 하는 건 수익 전망이 뚜렷한 사업을 못 찾아서지, 꼭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알 사람은 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낙수효과는 작동한 적이 없다”며 “우리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경제를 재건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말하는 저소득층·중산층 중심 경제는 물이 바닥에서 솟구치는 ‘분수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소득층·중산층의 소득이 늘면 소비가 살아나고, 소비 증가가 투자 확대를 이끌어 경기를 살린다는 것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추가로 번 돈을 곧장 지출하는 ‘한계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복지 확대, 임금 인상 등으로 이들의 실질소득을 늘려주는 것이 경제 활성화의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우리 정부는 이런 바이든의 정책과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 버클리) 이매뉴얼 사에즈 교수 등은 저서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에서 한 나라의 불평등 수준은 세금의 영향을 받으며, 세금 제도를 좌우하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어떤 민주주의냐’에 따라 ‘누구에게 얼마나 세금을 매기느냐’가 달라지며 이에 따라 불평등이 커지거나 줄어든다는 뜻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산을 가진 이와 못 가진 이의 격차가 더욱 커졌는데도 ‘부자 감세’가 추진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고장 났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은 재빨리 총리를 바꿔 잘못된 노선을 수정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라도 방향을 틀기 위해 국회 과반을 차지한 야당의 분발, 정부 여당의 각성, 시민사회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