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2022년 7월18일 국회에서 열린 ‘2022년 세제개편안 당정협의회’에서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우리는 이념보다 사람을 우선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하고 불행히도 그것은 세금 인상입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은 2022년 11월12일(현지시각) 우파 언론 <더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닷새 뒤 발표할 증세 계획의 취지를 설명했다. 영국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정부 역할을 축소하는 자유시장경제 이념을 중시한다. 감세는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런 보수당이 물가상승률 10%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치적 신념을 거스르면서까지 증세하기로 했다.
헌트 장관은 증세에 반대하는 지지층을 설득하기 위해 보수 진영에서 존경받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도 소환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1980년대에 자랐고 마거릿 대처가 어려운 결정을 내리며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꿨는지 봤다. 국가는 보수당이 인기 있는 정당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상황이 어려워질 때 신뢰할 수 있는 정당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보수당의 이런 결정에는 뼈아픈 이유가 있다. 전임 내각에서 감세 계획을 추진했다가 금융시장이 휘청였기 때문이다.
9월23일(현지시각) 리즈 트러스 당시 총리는 경제성장 대책으로 5년간 450억파운드(약 72조원)를 감세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득세 기본세율을 인하(20→19%)하고, 법인세율 인상 계획(19→25%)을 철회하는 내용 등이다.
그러자 금융시장에선 재정 확보 없는 감세로 향후 정부부채가 늘고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리란 우려가 퍼졌다.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를 내던지면서 국채가격이 하락하자 국채금리는 급등했다. 영국 통화인 파운드화 가치도 폭락했다. 트러스 총리는 감세안을 만든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헌트 장관을 새로 임명했다. 헌트 장관은 기존 감세안을 철회하기로 했다.
리즈 트러스 총리도 사태 책임을 지고 취임 45일 만에 물러났다. 이후 트러스의 경쟁자이자 감세 계획에 반대했던 리시 수낵 총리가 선출됐고, 헌트 장관은 11월17일 550억파운드 규모의 증세·지출감소 계획을 담은 예산안을 발표했다.
소득세 최고 세율 45%를 적용받는 기준을 연소득 15만파운드(약 2억4천만원)에서 12만5천파운드(약 2억원)로 낮춰,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다. 주식·부동산 양도차익에 대한 연간 비과세 범위도 1만2300파운드에서 2023년부터는 6천파운드, 2024년부터는 3천파운드로 줄인다. 고유가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인 에너지 대기업에 부과하는 이른바 ‘횡재세’는 현행 25%에서 35%로 세율을 인상한다.
감세 충격을 겪은 뒤 들어선 영국의 움직임은 현재 한국 정부의 행보와 대조된다. 우리 정부는 대기업 법인세율 인하,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감면, 중산·서민층 소득세 인하, 고액 주식투자자 양도소득세 과세 연기 등 대규모 감세를 추진한다. 5년간 60조원을 감세하는 2022년 세제개편안이 국회에서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운데 논란이 큰 건 법인세 인하다. 정부는 대기업이 적용받는 법인세 최고세율(과세표준 3천억원 초과)을 현행 25%에서 22%로 낮추겠다고 했다. 경기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기업에 세금 부담을 줄여줘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법인세 평균 실효세율 1%포인트 인하 시 투자율이 0.2%포인트 증가한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법인세율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높은 편에 속한다. 국회 예산정책처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법인세 최고세율(지방세 포함)은 한국이 27.5%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23.2%보다 4.3%포인트 높다. 하지만 미국 등 주요 7개국(G7) 평균(26.7%)보다는 불과 0.8%포인트 높아 차이가 크지 않다.
섣부른 감세안으로 큰 경제 혼란을 몰고 온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현지시각) 총리관저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보수당 대표직에서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트러스 총리는 취임 후 불과 45일만에 사임 의사를 밝혀 영국 헌정 사상 최단명 총리로 기록되게 됐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특히 정부가 주장하는 ‘감세→투자 증가→경제성장 선순환’ 논리는 경제학계에서 오랜 논쟁거리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부터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대폭 낮추는 등 일련의 감세를 단행했다. 미 의회조사국은 2019년 5월 “감세 조치가 미국의 경제성장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같은 해 미국 500대 기업을 분석한 결과 “감세 정책 이후 기업은 보유 현금의 80%를 주주에게 배분했으며 연구·개발 등 실질 투자에는 20%만 사용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사실을 우리 정부도 알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2019년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법인세 인하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이를 반박하는 자료를 냈다. 당시 기재부는 미 의회조사국 자료를 인용하면서 “경제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감세조치는 소비·투자 등 지출 증가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기업 투자는 법인세뿐 아니라 대내외 경제 여건, 전략적 의사결정 등에 크게 영향받는다”고 했다.
이정은 국회 예산정책처 추계세제분석실장은 11월7일 낸 ‘2022년 세법개정안 분석 보고서’에서 “대내외 경제 여건의 불확실성이 커져 법인세 인하 효과가 제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전반적인 감세 계획에 관해 그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재정지출 증가와 성장잠재력 둔화 등을 고려할 때 중장기 재정건전성이 나빠질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주식·펀드 등 금융상품에 투자해 고액의 수익을 거둔 이들에게 부과하기로 한 금융투자소득세를 2년 미루겠다는 정부 방침도 논란이다.
2020년 국회는 주식 양도차익이 5천만원(3년 손익 합산)을 넘으면 20~25%를 과세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었던 추경호 부총리는 해당 법안을 발의한 당사자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경제 총책임자가 된 이후 그는 증시 상황이 나쁘다며 과세 시기를 2023년에서 2025년으로 연기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와 별도로 현재 보유주식 10억원이 넘는 초고액 주식보유자에게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데, 추 부총리는 이마저도 금액 기준을 100억원으로 올려 과세 대상을 축소하는 계획을 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투자협회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주요 5개 증권사에서 지난 3년간(2019~2021년) 실현손익 5천만원을 넘긴 투자자는 전체 투자자의 0.9%에 불과하다. ‘상위 1%’ 과세 계획을 물리려는 것이다. 정부는 고액 투자자들이 과세로 인해 주식시장을 떠나면 주가 자체가 하락하므로 주식시장에 악영향을 미치고 결국 소액투자자들도 피해를 볼 거라는 주장을 편다.
조세재정연구원장을 지낸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11월4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공청회에서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로 제일 고통받는 사람은 소득 취약계층이며, 필요한 수준의 재정 확대는 꼭 있어야 한다. 우리 경제 상황은 감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증가한 유동성으로 자산 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자산과 자산소득 과세 강화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라고 강조했다.
반면 평소 증세론을 주장하는 황성현 인천대 교수(전 한국재정학회장)는 이번 감세가 속도 조절을 하는 수준으로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코로나19 이후 부동산·주가 상승으로 세금이 많이 걷혀 조세부담률이 빠르게 오른 점을 고려하면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감세를 숨 고르기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세부담률(국내총생산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18.8%에서 2020년 20%로 3년간 1.2%포인트 올랐지만, 2021년 22.1%로 2.1%포인트 올랐고 2022년은 23.3%로 1.2%포인트 오르는 등 증가 속도가 비교적 빨랐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감세와 2023년 경기둔화로 2023년 조세부담률은 22.6%로 낮아지고 향후 2026년까지 22.9%로 점진적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세금을 올리는 일은 진보나 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인기 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인구구조 변화로 증가하는 복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서고 국정지지도가 높을 때 증세나 사회개혁 과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첫해인 2017년에 고소득자·대기업 증세를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2년차인 2014년 ‘서민 증세’라는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담뱃값을 올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뒤 6개월간 지지율 30% 안팎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태원 참사 등으로 국정 동력을 상당 부분 잃은 상황이다. 금융투자소득세 2년 연기도 실제는 불만을 표출하는 계층의 눈치를 보는 ‘포퓰리즘 결정’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한 정부 관계자는 “투자자들의 반발이 큰 상황에서 과세를 추진할 경우 정치적으로 부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감세안의 운명은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에 달려 있다. 민주당은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부자 감세’로 규정하고 법인세 인하, 금융투자소득세 부과 연기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최근 금융투자소득세 유예 방침에 동의하자는 의견을 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민주당 내부에서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해당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 신동근 의원은 11월15일 페이스북에 “주식시장에 금융투자소득세가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반대 여론에 우리가 손을 들어버린다면 이보다 훨씬 저항이 심한 개혁과제는 추진할 수 없다”며 예정대로 금융투자소득세를 시행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기획재정위는 11월16일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30일까지 심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