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검찰의 당사 압수수색에 항의해 보이콧한 가운데 2023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639조원 규모의 2023년도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 힘겨루기가 뜨겁다. 경제위기를 맞아 저소득·취약계층을 지원하는 민생예산 처리가 최대 쟁점 중 하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월말 국회 시정연설에서 내년도 예산안의 화두로 ‘재정 건전성’과 함께 ‘약자복지’를 제시했다. 하지만 국회 심사 과정에서 오히려 복지를 축소한 사례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실제로는 약자복지를 줄여 놓고, 말로만 늘린 것처럼 강조해서 국민의 눈을 속이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법정 자연증가분을 제외한 나머지 복지예산은 올해보다 줄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등 ‘부자감세’를 동반한 내년도 예산안으로는 재정 건전성과 약자복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우려는 진작부터 제기됐었다. 고물가·고금리로 취약계층의 고통이 커지는 상황에서 약자복지 축소는 사실상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 분배구조를 악화시켜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부자감세를 저지하고, 대통령실 이전 예산 등을 줄이는 대신 민생예산을 늘리겠다며 5~6조원 규모의 ‘10대 민생예산’을 제시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국정 발목잡기”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자칫 헌법상 예산안 처리기한인 12월2일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공공형 노인 일자리, 공공임대주택, 청년 지원 예산 삭감은 대표적인 약자복지 축소 사례로 꼽힌다. 윤 정부는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60만8천개에서 54만7천개로 6만1천개(10%) 줄이기로 하고 관련 예산 922억원을 깎았다. 또 공공임대주택 예산도 5조7천억원이나 삭감했다. 청년 예산도 대폭 칼질을 당했다. 청년의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내일채움공제 예산(-6724억원), 청년 고용을 지원하는 청년추가고용장려금(-7659억원), 청년채용특별장려금(-4559억원),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805억) 등 직접적인 청년 예산 감축만 2조원에 육박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분야별로 보면 고용, 임대주택 예산이 가장 많이 줄었다”고 분석했다.
공공형 노인 일자리 축소는 저소득층 어르신들의 민간 취업이 힘든 상황에서 노인 빈곤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공공임대주택 예산도 국민임대·영구임대·다가구매입임대·노후 공공임대주택 리모델링 등 주거빈곤층 지원이 대부분이다. 청년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청년들의 미래와 관련된 지원을 대폭 줄인 것도 명분이 약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공공형 노인 일자리 축소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공공임대주택과 청년 지원 예산 감축은 원안 유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결국 지난 16일 국회 국토교통위 예산결산심사소위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전액 원상복구하는 증액안이 의결되어 여야가 정면 충돌했다.
규모가 큰 약자보호 사업의 예산만 줄어든 게 아니다. 정부가 정의당 배진교 의원에게 제출한 ‘지출 재구조화 사업’ 관련 주요 내용을 보면, 규모가 작은 여러 민생예산과 복지예산도 칼질을 당했다. 일례로 초등 돌봄교실 시설 확충(-210억원),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158억원), 초등 돌봄 과일간식 지원(-72억원)은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약자복지’ 축소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정확한 실상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공개한 지출 재구조화 사업 내역은 전체 24조원 중 16조원에 그친다. 예산안의 총 사업 항목 수가 1만개에 달해, 정부가 내역을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한 파악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획재정부는 나머지 미공개 사업에 대해 “규모가 매우 작은 사업이어서 제출이 어렵다”고 해명했다. 여러 소규모 약자복지 사업이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예산 삭감의 칼질을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현수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취약계층 지원은 한번 끊기면 대체수단이 마땅치 않고, 정부가 새로 신설 또는 확대하는 약자복지와는 지원 대상이나 정책 목적이 달라 복지 사각지대로 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말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약자복지를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지원 사례들을 소개하는데 연설문의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기준중위소득을 역대 최대폭으로 인상해 기초생활보장 지원에 18조7천억원 반영, 저임금 근로자·특수형태 근로종사자·예술인의 사회보험 지원 대상 확대, 장애수당 8년만에 인상, 한 부모 자녀 양육 지원 대상을 중위소득 60%까지 확대 등은 그 일부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부 약자복지 축소 차원을 넘어서, 법정 자연증가분을 제외하고 윤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실질적인 복지 지출이 올해보다 줄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내년 예산안 중 보건·복지·고용 분야 지출은 227조원으로, 2022년에 비해 4.1%(8조9042억원) 늘었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 5년간 평균 증가율 10.5%의 절반 수준에 못 미친다”면서 “노인층 증가와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공적연금과 기초연금의 자연증가분 10조7300억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분야의 예산은 오히려 1조8262억원 줄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예산안 발표 때마다 눈속임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정부 입맛에 맞는 사업만 공개할 게 아니라 전체 내역을 자세하고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상민 선임연구위원은 “윤 정부가 내년도 사회적 약자 지원 4대 핵심과제로 저소득층 21조원, 장애인 5조8천억원, 취약청년 24조1천억원, 노인아동청소년 23조3천억원 등 총 74조4천억원 지출한다고 강조했는데, 세부 사업내역을 공개하지 않아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예산이 늘어난 부분도 법정 자연증가분과 나머지 증가분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최현수 연구위원은 “자연증가분은 정부의 정책의지와 전혀 상관없다”면서 “정부가 진짜 약자복지를 할 의지가 있는지를 보려면 자연증가분을 제외한 나머지 예산으로 비교·평가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약자복지 축소 배경에는 부자감세라는 근본 문제가 놓여있다는 지적이 많다. 부자감세로 인해 향후 5년간 60~73조원의 대규모 세수 감소가 불가피한데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다 보니 약자복지 축소라는 ‘아랫돌 빼서 위돌 괴기’식의 대처가 나왔다는 진단이다. 이상민 선임연구위원은 “부자감세로 세수가 5년간 60조원 이상 줄어드는 상황에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면서 물가인상 및 저출생·고령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복지예산 편성은 불가능하다”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의 편법 대응은 고물가·고금리로 고통받고 있는 저소득·취약계층을 최악의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 이게 결코 기 우가 아니라는 것을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가 보여준다. 국 내 가구의 월평균 실질소득은 전년 대비 2.8% 줄었는데, 소득 최하위 1분위의 감소폭이 -6.5%로 2~5분위의 -2~-3.1%에 비해 2~3배나 컸다. 소득분배도 더욱 악화됐다. 최상위 5분위 소득을 최하위 1분위 소득으로 나눈 ‘균등화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명목소득 기준)은 5.75배로 1년 전의 5.34배보다 더욱 커졌다.
윤 정부는 이런 우려를 경청하기보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핵심으로 하는 감세안이 부자감세가 아니라는 억지 주장만 되풀이한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의 수혜 대상은 연간 이익 3천억원 이상 상위 0.01% 대기업이다. 세율 인하로 대기업의 이익이 늘어도 그 혜택은 총수와 임직원에 집중되거나 기업 내부에 쌓일 가능성이 높다. 또 주식 투자 등으로 거둔 수익 중 5천만원 초과분에 20%(3억원 초과분은 25%)를 세금으로 걷는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2년 유예, 종합부동산세 완화, 상속·증여세 인하도 상대적으로 부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된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지난 7일 세법 개정안 토론회에서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예정처는 “2023~2027년 5년간 대기업 세부담 완화 규모는 누적 기준 20조7천억원이고, 중소·중견기업은 10조2천억원”이라면서 “또 연소득 7600만원 초과 고소득층 세부담 완화 규모는 14조2천억원이고, 서민·중산층은 11조7천억원”이라고 발표했다. 정부가 소득세 하위 2개 과표구간 상향조정, 중소·중견기업 법인세율 인하로 저소득층과 중소·중견기업의 세부담이 더 많이 완화됐다고 강조한 게 무색해졌다.
정부는 트러스 전 영국 총리가 잘못된 부자감세로 금융시장을 대혼란에 빠뜨렸다가 물러난 일을 교훈 삼아 부자감세를 철회하라는 야당의 요구에 대해서도 한국은 영국과 다르다며 생고집을 피운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홍익대 교수)은 “최소한 트러스 전 영국 총리는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서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면서 부자감세와 재정 건전성을 고집하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백번 양보해서 윤 정부의 감세안이 부자감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경제위기가 심각하고 낙수효과마저 희미한 상황에서는 감세의 투자·고용 유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이명박 정부의 법인세 인하 실패 사례는 좋은 본보기다. 이명박 정부 시절 법인세 인하로 세수가 20조~25조원 줄고, 고용과 투자가 부진한 대신 사내 유보만 급증하자, 박근혜 정부 들어 이른바 ‘기업소득 환류세제’를 도입했다. 기업소득 환류세제는 기업 이익을 투자, 임금 증가, 배당에 일정 수준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과세하는 제도이다.
이준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저서인 <미국 신자유주의 실험>에서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만약 미국(레이건과 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한 철저한 사례분석을 했더라면 아무 쓸모없는 모험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도 “최근 대내외 경제상황을 보면 정부가 기대한 정책효과가 온전히 나올지 불확실하다”고 윤 정부의 감세정책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기획재정부는 “법인세 인하의 투자·고용 증가 효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의 과거 사례에 확인된다”면서 기존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와 상대적으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양호한 재정 상황에서는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약자복지를 줄이기보다 오히려 확대하는 적극적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하는 전문가들이 다수다. 일부에선 이를 위한 증세 필요성까지 제기한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는 “(약자)복지 축소가 아니라 복지 확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증세와 복지 확대를 포함한 국가전략과 조세재정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그동안 반대해온 정부의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2년 유예 방안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선회하려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자칫 아무 명분없이 부자감세 반대와 약자복지 확대라는 기존 방침에 배치되는 선택을 할 경우 국민 불신을 자초할 수 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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